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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다, 컴패션] 내가 후원하는 아이는 다 성공할 거라 착각했죠

  • 작성일 2021-09-10

 

 

내가 후원하는 아이는 다 성공할 거라고 착각했죠.”

 

나의 컴패션 이야기

   

-강상규 후원자 편-

 

 

 

 

 

 

 

홈페이지에 빠져

새벽까지 보다

그냥 결연해 버렸죠

 

한, 12년 전쯤이네요. 가끔 서점에 가서 책을 훑어보는데 표지 사진이 예쁜 책이 있더라고요. 정혜영 씨, <오늘 더 사랑해>라는 책이었어요. 글씨가 많지 않고 사진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샀죠. 거기에서 컴패션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어요.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이라고 하는데 바로 검색을 해봤죠. 홈페이지가 예쁘게 잘 되어 있었고, 읽다 보니까 점점 빠져들더라고요.

 

첫 느낌은, 아이들이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아이들이 밝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인가 싶은 사진들이 오히려 더 궁금해졌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길래, 이렇게 아이들을 밝은 얼굴로 했을까. 그동안 많이 봤던 단체들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줬었는데 색다르더라고요. 환경을 바꿔주는 것보다, 한 아이의 존엄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구나, 알게 되었죠.

 

아무리 도움을 원한다 하더라도 어려운 내 자식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은 부모의 마음을 사진에 담아냈더라고요. 그 철학이 마음에 들었고 더 심금을 울렸던 건, 우리나라 한국전쟁 고아들을 돕기 위해 시작됐다는 말에 가슴에 와 닿았죠, 이게.

 

한 아이를 이렇게 입양하듯이 한다는, 컴패션의 가치와 노하우를 봤을 때는 좀 신뢰가 갔었어요. 그래서 홈페이지 보다가 새벽 정도에 그냥 결연해 버렸어요. 

 

 

 

 

좋아하는 사람을 부르라는 말에

제 이름을 불렀다는 아이,

짜릿했죠

 

첫 후원 어린이, 헤이손을 만난 게 2008년 겨울 정도였던 같아요. 아이를 선택하지는 않았고, 결연 신청만 하고 컴패션에서 보내주는 아이를 기다렸어요. 기다리는 기간이 되게 떨렸어요. 한 일주일 정도 있다가 한국컴패션에서 우편물이 왔는데 네 살짜리 콜롬비아 아이, 헤이손… 처음 만난 거죠.

 

네 살이고 긴장한 표정! 귀여운데 밝은 표정은 아니었어요, 처음에. 콜롬비아는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이기도 해서, 막 꿰어맞췄죠. 이거 운명이다. 받자마자 편지 쓰고 되게 신났었어요. 점점 아이가 밝아지고 밝아지는 걸 넘어서서 개구져 보이는 표정들이 감춰지지가 않더라고요. 너무 좋았어요. 그냥 사진이 아니라 뭔가 저를 보는 시선으로 느껴졌어요, 그때부터. 저희 큰아들보다 한 살이 많으니까 고2 정도 되는 나이거든요. 지금 사진 보면 덩치가 장난 아니에요. 편지에 보면 신체검사를 했는데 과체중이래요. (현재 17세)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요? 헤이손이 어렸을 때인데 학교에 축구부가 있었대요. 코치가 운동 시작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 이름 부르라고 했나 봐요. 헤이손이 제 이름 불렀다는 걸 편지에 썼는데 그때 기분이 짜릿하더라고요. 애가 공부는 잘 안 해서 그런가 편지를 잘 쓰지는 못해요. 그런데 그림을 잘 그려요. 처음에는 진짜 못 그렸었는데 그림이 예사롭지가 않고 밝아요. 항상 햇빛 그림을 그려요. 아내가 미술 치료를 하거든요. 아내가 헤이손은 정말 밝은 애라고 하더라고요. 밝은 아이들은 노란색 계열의 햇빛을 그리는데 헤이손 그림에는 하나 같이 해가 있는 거더라고요. 얘는 정말 밝은 애구나, 생각했었어요. 

 

 

 

 

내 주변 아이들도

컴패션 아이들인 거

아닌가?

 

컴패션을 만나고 보는 시야가 좀 넓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 안 보였던 것들에 대해 컴패션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니까 새로운 시각으로 와 닿더라고요.

 

저는 조그마한 소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다문화 가정이 굉장히 많아요. 다문화 가정 중에는 화목한 가정도 많지만 편부, 편모로 사는 친구들도 많고, 조부모와 산다든지 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예전에는 이 아이들을 볼 때 이질적으로 느껴졌었어요.

 

컴패션을 몰랐을 때는, 제 고향의 문화가 바뀌는 게 싫었어요. 뭔가 뺏기는 것 같기도 하고 문화적인 것이 달라지는 것 같고. 컴패션을 하면서 지구 반대편의 아이도 사랑한다고 편지도 쓰는데, 생각하니까, 새롭게 보이는 거예요. 쟤네도 컴패션 아이들인 거 아닌가? 그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아내가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과 후 선생님을 하고 있어서, 아내를 통해서 뇌종양이 걸려서 수술하는 베트남 엄마를 위해 모금활동을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제가 달라졌죠. 고려인 5세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한국말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거죠. 솔직히 컴패션이 아니었으면 그런 거 할 생각도 안 했을 거예요. 시야와 관점이 이렇게 좀 넓어지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관심, 보는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요? 예전에는 별로 관심도 없던 사람들에게 관심 자체가 넓어지고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을 결론적으로 해보게 됐어요.

 

 

 

  

나 이런 것까지 해봤다?

차에 그림까지

그려 봤어요!

 

컴패션은 TV 광고 같은 걸 안하니까 알려야겠다 싶었어요. 아이들이 한 명이라도 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싶어서, 교회 집사님들, 목사님한테 이야기하고, 작업장에서 후원 신청서도 놓고. 아이들 사진이 밝아서 전시용으로도 너무 좋아요, 느낌이 참 좋아요. 분위기가 밝아져요. 그러면서, 제가 여러 명 후원하는 것보다는, 그럴 수도 없었고요. 후원하는 사람이 100명이 되는 게 낫겠다, 그 마음은 다 한 사람의 마음 분량이니까, 그런 믿음이 생겼죠.

 

그런데 아내는 저만큼은 아니었어요. 당시 교회에 성가 대장님이었던 전도사님한테 제가 현지에 어린이를 만나러 가는 컴패션 비전트립을 가고 싶다고 하면서, 아내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거든요. 전도사님이 그랬어요. 그 비전트립에 아내를 보내라고.

 

“여보, 혼자 여행 갔다 와.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었지? 내가 볼 테니까, 일주일 여행 갔다 와.” 아내는 신혼여행 이후로 첫 혼자 가는 여행이었어요. 필리핀에 컴패션 비전트립으로 일주일을 다녀 온 아내를 마중하러 공항에 갔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오빠, 나 잘 갔다 왔어.”하면서 “여보! 나 성령 받은 것 같아. 예수님을 본 것 같아.” 이러는 거예요.

  

그러더니 아내가 차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거죠. 우리 차가 도화지처럼 깨끗한 하얀색 마티즈였거든요. 컴패션 달력에 나오는 아이들 그림을 골라서 하루 종일 그렸죠. 몇 년 지나서 아내가 비전트립을 또 보내 달라는 거예요. 가면서 아내가 미션을 줬죠. 차 다 지워놓으라고. 일주일 동안 아세톤을 몇 병을 썼는지 몰라요. 여름에! 손가락 다 곱고. 아내는 또 울면서 왔죠. 이번에는 차에 헤이손이 보내준 그림을 그렸어요. 이제 진짜 스토리가 담긴 거죠.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어보고. 결연도 많이 하고. 나 이런 것까지 해봤다? 차에 그림까지 그려봤어요, 진짜.

 

 

 

제가 교만했던 거예요

성공해야 한다고

외형적으로 변해갔던 거죠

 

제 아들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 졸업 선물로 태국에 자전거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태국 시골, 치앙마이 북쪽으로 미얀마 국경 전까지 한 일주일 다녀왔어요. 여행을 하다가 시골길에서 목이 말라서 구멍가게에 들어갔어요. 음료수 시켜서 먹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저랑 나이가 비슷하든지 조금 더 많든지 할 거예요. 그분이 저희를 흐뭇하게 이렇게 보는 거예요. 저희 입고 있던 옷이 파란색에 컴패션 딱 쓰여 있는 옷이었거든요. 우리가 태국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영어를 하실 수도 없고. 다행히 구글 번역기가 있어서, 번역기로 대화를 시작했어요. 

 

자기는 컴패션 후원 받았던 아이다, 컴패션에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옷에 컴패션 글자가 있고 해서 너무 반가웠다! 그 잠깐의 대화와 표정이 너무 강렬했어요. 저는 쉽게 생각해서 후원하는 아이는 다 성공할 것이다 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죠. 컴패션 후원, 이런 양질의 후원을 받는데 대학도 가고 변호사도 하고 의사도 하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분을 본 순간 깨졌어요. 실망감이 아니라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이분이. 그리고 그 표정이 너무 고마워하는 거예요, 컴패션에 대해서.

 

(울컥하는) 아, 큰일 났네요. 큰일 났어요.

 

제 아들이 옆에 있었잖아요. 저처럼 우리 아들도 의사나 수의사 정도는, 그랬던 거죠. 그 아주머니를 본 순간 뒤통수가 맞은 것 같았어요.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막연히 행복하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속으로는 얘가 막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저보다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공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교만한 생각들이 저기에 있었던 거죠. 제가 의도해서 만난 게 아니잖아요. 운명적으로 만난 거예요. 저는 그날 이후로 많이 자유해져서 더 기대가 생겼어요. 우리 애가 100이라는 걸 갖고 있는데 우리는 공부가 100이라고 착각을 해요. 공부는 50밖에 안 되는데, 나머지 50이 너무 기대되지 않나요? 뭘 할지 모르겠지만, 뭐를 하든 아들이 행복할 거라는 건 1%의 의심도 없어요.

 

헤이손에게 편지에 쓸 때에는 크리스천으로서 가치를 갖고 이야기를 해요. 너는 존재 자체로 소중한 아이라고 하면서, 그런데 제 아이들에게 성공해야 한다고 다르게 말하면 안되잖아요. 거꾸로 배우는 거죠. 컴패션 아이들도 어린이센터에서 만나면 행복한 모습인데, 집에 가서 조건을 보면 우리 기준으로는 전혀 행복할 상황이 아니거든요. 아이들 표정과 행복과 해맑은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배우는 거죠. 어쩌면 어릴 때 나도 그랬는데, 커가면서 외형을 보게 되었던 게 제 스스로 안타까웠던 것 같아요.

 

 

 

 

 

내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을까요?

 

컴패션의 단어처럼 공감하면서 같이 아파하기도 하고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자라면서 서로 같이 이렇게 격려해 주면서 가는 그게 진짜 행복을 나누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정말 행복해져야겠다, 생각을 특히나 요즘 더 많이 해요. 10년 후에도 컴패션에 열정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지속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뭔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죠. 내가 좋아하는 걸로 뭔가 컴패션 알리기 시작하면 평생 할 수 있겠다, 이 생각이 들었어요. 컴패션과 상관없이 자전거도 꾸준히 탈 테니까. 자전거는 원래 좋아했으니까.

 

막 찾아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미국 후원자 몇 명이 자전거로 컴패선 아이들에게 장학금 해주는 걸 했더라고요. 그래서 친한 사람들 셋이서 서울에 있는 컴패션 사무실에서 부산까지 가자 했어요! 2012년이 한국의 컴패션이 시작된 지 60년 되는 해였어요. 2013년에 의미를 담아서 SNS에 싣고. 결연서 몇 장 자전거에 꽂고, 5박 6일을 길거리에서 자면서 간 거예요.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물어보면 컴패션 이야기를 하면서, 결연서도 찔러주고 나눠만 줬어요.

 

▶ 뙤약볕에서, 천천히 페달을 밟는 사람들 [전체 이야기 보기]

 

이렇게 CFC라는 게 시작되어서 2015년부터 아이들한테 자전거 205대 사줄 수 있는 금액이 모금이 돼서 통학용 자전거 선물을 해줬고요. 해마다 엘살바도르 가정용 정수 필터를 해준다든지 필리핀 아빠들에게 자전거 택시를 선물해 준다든지, 태국 엄마들에게 재봉틀 선물을 해준다든지 했죠. 중요한 건 제가 해주고 싶은 걸 한 게 아니라 거기에서 필요한 걸 해야 하는 거잖아요. 컴패션이 사전 조사를 해줬어요. 어디에서 이게 필요하다고 하기도 하고, 제가 이걸 좀 선물해 주고 싶은데 필요한 국가와 지역을 알아봐 달라, 그러면 컴패션에서 알아봐 줘서 서로 맞아떨어지게 컴패션이 정말 그런 건 기가 막히게 잘해줬어요. 모금된 거 운영비나 이런 걸로 많이 안 빠지게 하고, 그래서 지금, 컴패션 땡큐! 

 

 

 

 

 

 

자유와 독립심을

가르쳐 준

자전거

 

자전거는 저에게 자유를 줬어요. 고2 때 저를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처음으로 가족을 잃은 경험을 했지요. 아버지가 너 갖고 싶은 거 뭐든 하나 사주겠다, 하셨죠. 위로였어요. 자전거요, 라고 했어요. 혼자 자전거 타러 많이 다녔죠. 대학 가서 혼자 무전여행도 하면서 저에게 자유를 처음 이렇게 느끼게 해줬어요. 그리고 자립심.

 

예전에 한국컴패션 서정인 대표님이 전기 자전거로 같이 하겠다, 했는데 오지 마십시오, 그랬어요.  저희 캠페인의 의미와 가치와 안 맞는다고. 자기 힘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제가 느낀 자유와 자립심을 컴패션 아이들이 느끼면 너무 좋겠다, 싶었어요. 자전거는 가만히 서 있으면 넘어지잖아요. 계속 움직여야 한단 말이죠.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지키려면 계속 움직여야 하지요. 그래서 발을 계속 움직여야 해요. 자기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또 중요한 것이 앞으로만 가서는 안 되고 균형을 잡으면서 갈 때, 방향이 중요하잖아요. 열심히 가서, 못된 성공으로도 갈 수 있잖아요. 세상에 득이 되지 않은 성공으로도 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바른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거지요.

  

저는 항상 8월 8일 전후로 자전거를 타요. 8 자가 이렇게 옆으로 놓으면 자전거 같잖아요. 또 여름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많이 없어요. 그 삼복더위에, 거의 말복 때거든요. 기온이 35도, 40도 가까이 되는 때예요. 하루에 100km씩 타니까. 사람들이 궁금해하죠. 캠페인 이야기를 하면 더 관심을 가지시더라고요. 그리고, CFC 할 때는 비싼 자전거로는 안 해요. 노숙인 분들이 만든 자전거라든지 바구니 자전거 같은 생활용 자전거로 타서 우리 생활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나름대로 의미를 담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자전거가 매력 있죠. CFC 하면서 여름 휴가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아내에게는 지금도 좀 미안해요. 

 

 

 

기도요

또 눈물 나면 안 되는데…

천국에서 만난다면

 

헤이손을 위해 기도할게요. 또 눈물 나면 안 되는데. (웃음) 하나님 아버지 너무 감사합니다. 저를 12년 전에 헤이손과 연결을 시켜주셔서 지금까지 그 연결이 잘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제가 준 것보다 제가 받은 게 너무 많고, 같이 자라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연이 되어 만날 것에 대해 꿈을 꿔봅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만난다면, 서로를 안아주고 기쁨의 눈물, 고마움의 인사와 포옹이 있는 헤이손과 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강상규 후원자처럼 나도 특별한 친구를 만나고 싶다면?

 

*폰트지원: 산돌구름

 

 

내가 후원하는 아이는 다 성공할 거라고 착각했죠.”

 

나의 컴패션 이야기

   

-강상규 후원자 편-

 

 

 

 

 

 

 

홈페이지에 빠져

새벽까지 보다

그냥 결연해 버렸죠

 

한, 12년 전쯤이네요. 가끔 서점에 가서 책을 훑어보는데 표지 사진이 예쁜 책이 있더라고요. 정혜영 씨, <오늘 더 사랑해>라는 책이었어요. 글씨가 많지 않고 사진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샀죠. 거기에서 컴패션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어요.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이라고 하는데 바로 검색을 해봤죠. 홈페이지가 예쁘게 잘 되어 있었고, 읽다 보니까 점점 빠져들더라고요.

 

첫 느낌은, 아이들이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아이들이 밝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인가 싶은 사진들이 오히려 더 궁금해졌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길래, 이렇게 아이들을 밝은 얼굴로 했을까. 그동안 많이 봤던 단체들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줬었는데 색다르더라고요. 환경을 바꿔주는 것보다, 한 아이의 존엄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구나, 알게 되었죠.

 

아무리 도움을 원한다 하더라도 어려운 내 자식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은 부모의 마음을 사진에 담아냈더라고요. 그 철학이 마음에 들었고 더 심금을 울렸던 건, 우리나라 한국전쟁 고아들을 돕기 위해 시작됐다는 말에 가슴에 와 닿았죠, 이게.

 

한 아이를 이렇게 입양하듯이 한다는, 컴패션의 가치와 노하우를 봤을 때는 좀 신뢰가 갔었어요. 그래서 홈페이지 보다가 새벽 정도에 그냥 결연해 버렸어요. 

 

 

 

 

좋아하는 사람을 부르라는 말에

제 이름을 불렀다는 아이,

짜릿했죠

 

첫 후원 어린이, 헤이손을 만난 게 2008년 겨울 정도였던 같아요. 아이를 선택하지는 않았고, 결연 신청만 하고 컴패션에서 보내주는 아이를 기다렸어요. 기다리는 기간이 되게 떨렸어요. 한 일주일 정도 있다가 한국컴패션에서 우편물이 왔는데 네 살짜리 콜롬비아 아이, 헤이손… 처음 만난 거죠.

 

네 살이고 긴장한 표정! 귀여운데 밝은 표정은 아니었어요, 처음에. 콜롬비아는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이기도 해서, 막 꿰어맞췄죠. 이거 운명이다. 받자마자 편지 쓰고 되게 신났었어요. 점점 아이가 밝아지고 밝아지는 걸 넘어서서 개구져 보이는 표정들이 감춰지지가 않더라고요. 너무 좋았어요. 그냥 사진이 아니라 뭔가 저를 보는 시선으로 느껴졌어요, 그때부터. 저희 큰아들보다 한 살이 많으니까 고2 정도 되는 나이거든요. 지금 사진 보면 덩치가 장난 아니에요. 편지에 보면 신체검사를 했는데 과체중이래요. (현재 17세)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요? 헤이손이 어렸을 때인데 학교에 축구부가 있었대요. 코치가 운동 시작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 이름 부르라고 했나 봐요. 헤이손이 제 이름 불렀다는 걸 편지에 썼는데 그때 기분이 짜릿하더라고요. 애가 공부는 잘 안 해서 그런가 편지를 잘 쓰지는 못해요. 그런데 그림을 잘 그려요. 처음에는 진짜 못 그렸었는데 그림이 예사롭지가 않고 밝아요. 항상 햇빛 그림을 그려요. 아내가 미술 치료를 하거든요. 아내가 헤이손은 정말 밝은 애라고 하더라고요. 밝은 아이들은 노란색 계열의 햇빛을 그리는데 헤이손 그림에는 하나 같이 해가 있는 거더라고요. 얘는 정말 밝은 애구나, 생각했었어요. 

 

 

 

 

내 주변 아이들도

컴패션 아이들인 거

아닌가?

 

컴패션을 만나고 보는 시야가 좀 넓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 안 보였던 것들에 대해 컴패션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니까 새로운 시각으로 와 닿더라고요.

 

저는 조그마한 소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다문화 가정이 굉장히 많아요. 다문화 가정 중에는 화목한 가정도 많지만 편부, 편모로 사는 친구들도 많고, 조부모와 산다든지 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예전에는 이 아이들을 볼 때 이질적으로 느껴졌었어요.

 

컴패션을 몰랐을 때는, 제 고향의 문화가 바뀌는 게 싫었어요. 뭔가 뺏기는 것 같기도 하고 문화적인 것이 달라지는 것 같고. 컴패션을 하면서 지구 반대편의 아이도 사랑한다고 편지도 쓰는데, 생각하니까, 새롭게 보이는 거예요. 쟤네도 컴패션 아이들인 거 아닌가? 그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아내가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과 후 선생님을 하고 있어서, 아내를 통해서 뇌종양이 걸려서 수술하는 베트남 엄마를 위해 모금활동을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제가 달라졌죠. 고려인 5세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한국말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거죠. 솔직히 컴패션이 아니었으면 그런 거 할 생각도 안 했을 거예요. 시야와 관점이 이렇게 좀 넓어지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관심, 보는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요? 예전에는 별로 관심도 없던 사람들에게 관심 자체가 넓어지고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을 결론적으로 해보게 됐어요.

 

 

 

  

나 이런 것까지 해봤다?

차에 그림까지

그려 봤어요!

 

컴패션은 TV 광고 같은 걸 안하니까 알려야겠다 싶었어요. 아이들이 한 명이라도 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싶어서, 교회 집사님들, 목사님한테 이야기하고, 작업장에서 후원 신청서도 놓고. 아이들 사진이 밝아서 전시용으로도 너무 좋아요, 느낌이 참 좋아요. 분위기가 밝아져요. 그러면서, 제가 여러 명 후원하는 것보다는, 그럴 수도 없었고요. 후원하는 사람이 100명이 되는 게 낫겠다, 그 마음은 다 한 사람의 마음 분량이니까, 그런 믿음이 생겼죠.

 

그런데 아내는 저만큼은 아니었어요. 당시 교회에 성가 대장님이었던 전도사님한테 제가 현지에 어린이를 만나러 가는 컴패션 비전트립을 가고 싶다고 하면서, 아내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거든요. 전도사님이 그랬어요. 그 비전트립에 아내를 보내라고.

 

“여보, 혼자 여행 갔다 와.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었지? 내가 볼 테니까, 일주일 여행 갔다 와.” 아내는 신혼여행 이후로 첫 혼자 가는 여행이었어요. 필리핀에 컴패션 비전트립으로 일주일을 다녀 온 아내를 마중하러 공항에 갔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오빠, 나 잘 갔다 왔어.”하면서 “여보! 나 성령 받은 것 같아. 예수님을 본 것 같아.” 이러는 거예요.

  

그러더니 아내가 차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거죠. 우리 차가 도화지처럼 깨끗한 하얀색 마티즈였거든요. 컴패션 달력에 나오는 아이들 그림을 골라서 하루 종일 그렸죠. 몇 년 지나서 아내가 비전트립을 또 보내 달라는 거예요. 가면서 아내가 미션을 줬죠. 차 다 지워놓으라고. 일주일 동안 아세톤을 몇 병을 썼는지 몰라요. 여름에! 손가락 다 곱고. 아내는 또 울면서 왔죠. 이번에는 차에 헤이손이 보내준 그림을 그렸어요. 이제 진짜 스토리가 담긴 거죠.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어보고. 결연도 많이 하고. 나 이런 것까지 해봤다? 차에 그림까지 그려봤어요, 진짜.

 

 

 

제가 교만했던 거예요

성공해야 한다고

외형적으로 변해갔던 거죠

 

제 아들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 졸업 선물로 태국에 자전거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태국 시골, 치앙마이 북쪽으로 미얀마 국경 전까지 한 일주일 다녀왔어요. 여행을 하다가 시골길에서 목이 말라서 구멍가게에 들어갔어요. 음료수 시켜서 먹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저랑 나이가 비슷하든지 조금 더 많든지 할 거예요. 그분이 저희를 흐뭇하게 이렇게 보는 거예요. 저희 입고 있던 옷이 파란색에 컴패션 딱 쓰여 있는 옷이었거든요. 우리가 태국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영어를 하실 수도 없고. 다행히 구글 번역기가 있어서, 번역기로 대화를 시작했어요. 

 

자기는 컴패션 후원 받았던 아이다, 컴패션에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옷에 컴패션 글자가 있고 해서 너무 반가웠다! 그 잠깐의 대화와 표정이 너무 강렬했어요. 저는 쉽게 생각해서 후원하는 아이는 다 성공할 것이다 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죠. 컴패션 후원, 이런 양질의 후원을 받는데 대학도 가고 변호사도 하고 의사도 하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분을 본 순간 깨졌어요. 실망감이 아니라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이분이. 그리고 그 표정이 너무 고마워하는 거예요, 컴패션에 대해서.

 

(울컥하는) 아, 큰일 났네요. 큰일 났어요.

 

제 아들이 옆에 있었잖아요. 저처럼 우리 아들도 의사나 수의사 정도는, 그랬던 거죠. 그 아주머니를 본 순간 뒤통수가 맞은 것 같았어요.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막연히 행복하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속으로는 얘가 막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저보다는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공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교만한 생각들이 저기에 있었던 거죠. 제가 의도해서 만난 게 아니잖아요. 운명적으로 만난 거예요. 저는 그날 이후로 많이 자유해져서 더 기대가 생겼어요. 우리 애가 100이라는 걸 갖고 있는데 우리는 공부가 100이라고 착각을 해요. 공부는 50밖에 안 되는데, 나머지 50이 너무 기대되지 않나요? 뭘 할지 모르겠지만, 뭐를 하든 아들이 행복할 거라는 건 1%의 의심도 없어요.

 

헤이손에게 편지에 쓸 때에는 크리스천으로서 가치를 갖고 이야기를 해요. 너는 존재 자체로 소중한 아이라고 하면서, 그런데 제 아이들에게 성공해야 한다고 다르게 말하면 안되잖아요. 거꾸로 배우는 거죠. 컴패션 아이들도 어린이센터에서 만나면 행복한 모습인데, 집에 가서 조건을 보면 우리 기준으로는 전혀 행복할 상황이 아니거든요. 아이들 표정과 행복과 해맑은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배우는 거죠. 어쩌면 어릴 때 나도 그랬는데, 커가면서 외형을 보게 되었던 게 제 스스로 안타까웠던 것 같아요.

 

 

 

 

 

내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을까요?

 

컴패션의 단어처럼 공감하면서 같이 아파하기도 하고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자라면서 서로 같이 이렇게 격려해 주면서 가는 그게 진짜 행복을 나누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정말 행복해져야겠다, 생각을 특히나 요즘 더 많이 해요. 10년 후에도 컴패션에 열정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지속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뭔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죠. 내가 좋아하는 걸로 뭔가 컴패션 알리기 시작하면 평생 할 수 있겠다, 이 생각이 들었어요. 컴패션과 상관없이 자전거도 꾸준히 탈 테니까. 자전거는 원래 좋아했으니까.

 

막 찾아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미국 후원자 몇 명이 자전거로 컴패선 아이들에게 장학금 해주는 걸 했더라고요. 그래서 친한 사람들 셋이서 서울에 있는 컴패션 사무실에서 부산까지 가자 했어요! 2012년이 한국의 컴패션이 시작된 지 60년 되는 해였어요. 2013년에 의미를 담아서 SNS에 싣고. 결연서 몇 장 자전거에 꽂고, 5박 6일을 길거리에서 자면서 간 거예요.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물어보면 컴패션 이야기를 하면서, 결연서도 찔러주고 나눠만 줬어요.

 

▶ 뙤약볕에서, 천천히 페달을 밟는 사람들 [전체 이야기 보기]

 

이렇게 CFC라는 게 시작되어서 2015년부터 아이들한테 자전거 205대 사줄 수 있는 금액이 모금이 돼서 통학용 자전거 선물을 해줬고요. 해마다 엘살바도르 가정용 정수 필터를 해준다든지 필리핀 아빠들에게 자전거 택시를 선물해 준다든지, 태국 엄마들에게 재봉틀 선물을 해준다든지 했죠. 중요한 건 제가 해주고 싶은 걸 한 게 아니라 거기에서 필요한 걸 해야 하는 거잖아요. 컴패션이 사전 조사를 해줬어요. 어디에서 이게 필요하다고 하기도 하고, 제가 이걸 좀 선물해 주고 싶은데 필요한 국가와 지역을 알아봐 달라, 그러면 컴패션에서 알아봐 줘서 서로 맞아떨어지게 컴패션이 정말 그런 건 기가 막히게 잘해줬어요. 모금된 거 운영비나 이런 걸로 많이 안 빠지게 하고, 그래서 지금, 컴패션 땡큐! 

 

 

 

 

 

 

자유와 독립심을

가르쳐 준

자전거

 

자전거는 저에게 자유를 줬어요. 고2 때 저를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처음으로 가족을 잃은 경험을 했지요. 아버지가 너 갖고 싶은 거 뭐든 하나 사주겠다, 하셨죠. 위로였어요. 자전거요, 라고 했어요. 혼자 자전거 타러 많이 다녔죠. 대학 가서 혼자 무전여행도 하면서 저에게 자유를 처음 이렇게 느끼게 해줬어요. 그리고 자립심.

 

예전에 한국컴패션 서정인 대표님이 전기 자전거로 같이 하겠다, 했는데 오지 마십시오, 그랬어요.  저희 캠페인의 의미와 가치와 안 맞는다고. 자기 힘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제가 느낀 자유와 자립심을 컴패션 아이들이 느끼면 너무 좋겠다, 싶었어요. 자전거는 가만히 서 있으면 넘어지잖아요. 계속 움직여야 한단 말이죠.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지키려면 계속 움직여야 하지요. 그래서 발을 계속 움직여야 해요. 자기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또 중요한 것이 앞으로만 가서는 안 되고 균형을 잡으면서 갈 때, 방향이 중요하잖아요. 열심히 가서, 못된 성공으로도 갈 수 있잖아요. 세상에 득이 되지 않은 성공으로도 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바른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거지요.

  

저는 항상 8월 8일 전후로 자전거를 타요. 8 자가 이렇게 옆으로 놓으면 자전거 같잖아요. 또 여름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많이 없어요. 그 삼복더위에, 거의 말복 때거든요. 기온이 35도, 40도 가까이 되는 때예요. 하루에 100km씩 타니까. 사람들이 궁금해하죠. 캠페인 이야기를 하면 더 관심을 가지시더라고요. 그리고, CFC 할 때는 비싼 자전거로는 안 해요. 노숙인 분들이 만든 자전거라든지 바구니 자전거 같은 생활용 자전거로 타서 우리 생활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나름대로 의미를 담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자전거가 매력 있죠. CFC 하면서 여름 휴가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아내에게는 지금도 좀 미안해요. 

 

 

 

기도요

또 눈물 나면 안 되는데…

천국에서 만난다면

 

헤이손을 위해 기도할게요. 또 눈물 나면 안 되는데. (웃음) 하나님 아버지 너무 감사합니다. 저를 12년 전에 헤이손과 연결을 시켜주셔서 지금까지 그 연결이 잘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제가 준 것보다 제가 받은 게 너무 많고, 같이 자라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연이 되어 만날 것에 대해 꿈을 꿔봅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만난다면, 서로를 안아주고 기쁨의 눈물, 고마움의 인사와 포옹이 있는 헤이손과 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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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지원: 산돌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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