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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한국전쟁 특집]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신혼집 세 채

  • 작성일 2021-06-17

2022년은 한국에서 시작된 컴패션이

7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한국에 부어진 사랑이 한국 땅,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꽃향기처럼 퍼져 나갔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회복지법인 미생회 최기숙 이사장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 미국인 목사가 한국에 오기를 바랐습니다.

젊은 나이에 타국에서 산화해 가는 미국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디작은 한국 전쟁 고아들이었습니다.

1952년, 전쟁 중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컴패션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1959년, 그는 전쟁 고아를 향해 같은 마음을 가진 젊은 한국인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전쟁 발발
 

 

1950년, 열 일곱 살의 저는 평안남도 여자고등부 대표 농구 선수였습니다.  합숙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오시더니 전쟁이 났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너무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홍콩과 무역을 하는 거상이셨습니다. 지주였기 때문에 북에 남아 있다가는 생명의 위협도 컸고, 더 이상 무역일을 계속하실 수도 없었습니다.  

 

11월 말에 아버지는 이제 여기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으니 남으로 내려가자고 하셨고, 그 당시 패잔병들이 여자 피난민들을 끌고 가거나 괴롭힌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저는 어머니 옷을 입고, 나이 든 행색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먼저 피난 길에 올랐습니다. 

아버지가 항상 저를 꼭 붙들고 먼저 앞서서 가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검문소의 크리스마스

 

 

대동강을 건너 한 달여간을 걸어서 간신히 서울에 도착했는데 검문소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신분 확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저를 수상하다고 통과를 안 시켜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통과시켜 달라고 거듭 빌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불현듯 머리 속에 노래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는데, 북에서 살 때 숙모님이 교회에 같이 가자고 하자고 하셔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한 번씩 가곤 했었는데 그때 들었던 노래가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검문소의 군인이 노려보며 아버지와 저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그 순간, 너무 무서웠지만 왠지 꼭 그 찬양을 불러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차올랐지만 용기를 내어, 크리스마스 노래를 불러도 되겠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검문소의 군인들의 차갑게 얼어붙은 눈빛이 순간적으로 잠깐 동안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을 정말 믿는지, 부를 수 있다면 한 번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눈을 꼭 감고 덜덜 떨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옆에서, 저는 숙모님과 크리스마스 때마다 교회에 가서 들었던 바로 그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저는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성탄절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아시아의 예루살렘

그곳에서 만난 예수님  

1950년 대구역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육군 기마 부대 

© 대구근대사 박물관 All rights reserved

 

 

서울에서 대구까지는 화물열차를 타고 내려갔습니다며칠동안 화물열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하니 정확히 1월 1일이었습니다.

 

대구에서 저는 스무 살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스물 세 살에 청년부 리더였던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부모님과 네 형제들은 모두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저만 남편과 함께 대구에 정착했습니다. 그 당시 대구는 부흥운동으로 수많은 집회가 열렸고, 사람들은 대구를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대구역에는 윤락여성이 정말 많았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청년부 성도들과 함께 대구역 앞의 윤락여성들을 자주 만나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구해달라고 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사연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전쟁고아가 되었는데, 밥을 굶고 있는 어린 형제자매들을 한 끼라도 먹이기 위해 대구역 앞에 나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직후라 그 당시에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고 일자리도 흔치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1950년 대구역

© 대구근대사 박물관 All rights reserved

 

 

 

신혼집으로 세 채가 필요했던 이유

 

 

아버지의 도움으로 나란히 붙어있는 기와집 세 채를 신혼집으로 구했습니다. 급하게 이들과 함께 살면서 올바른 삶으로 이끌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고민 끝에 윤락여성 선도사업이라고 해서 '미생() 기술원' 을 설립해서 집 하나는 사무실로 쓰기로 하고, 우선 여섯 명의 여성들을 대구역에서 데려왔습니다. 나머지 두 집에서 이들과 함께 자고 생활하면서 이들이 좋은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재봉틀 쓰는 법, 옷을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쳤습니다. 직장도 보내주고, 많은 여성들을 후원했습니다. 

 

아버지가 북에서 나올 때 급하게 금괴를 들고 오셨었는데, 아버지는 금괴를 팔아 기와집과 부대시설까지 마련해주시고, 친정식구들과 함께 딸이 "미생 기술원"을 설립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미생이라는 뜻은 새롭게 아름다운 삶을 살자는 의미에서 남편이 지었습니다

 

이들은 저에게 '우리만 여기서 편하게 있을 수 없으니 동생들을 데려올 수 없는지' 물었고 저와 남편은 흔쾌히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고 윤락여성들이 새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랑 나이 차이가 몇 살 나지 않는 아이들이나 여성들도 저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저의 소원 중 하나는 하루빨리 나이가 드는 것이었습니다. 옷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옷만 있었습니다.   

 

 

 

미생 기술원 그리고 벼랑 끝

 

어려운 일들 다 말해서 무엇합니까? 수많은 어려운 일들이 닥쳤고 양식이 떨어질 때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먹을 것이 다 떨어졌는데 너무 급해서, 결혼 때 해왔던 혼수 이불과 옷들을 팔러 인근의 칠성 시장에 리어카를 끌고 나갔는데, 장물인지 알고 아무도 사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멀리 다른 시장까지 가서 밀가루와 음식 몇 가지와 바꿔서 왔습니다. 모두가 굶고 있어서, 헐값이었지만 약간의 양식하고라도 어떻게든 바꾸어야 했습니다. 배불리 먹는 것부터가 참 쉽지 않은  때였지요. 

 

그래도 신앙의 결단으로 어떠한 난관이 있다 하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는 각오와 믿음이 확고 했고, 남편과 함께 이 길을 걸었기 때문에 고생스럽다고 느낄 새 없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아버지, 그리운 나의 아버지 

 

 

운영이 너무 어려워질 때면 서울로 아버지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친정에 가면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저를 조용히 따로 불러서 운영자금으로 쓰라며 돈을 주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정말 사랑해 주셨지만, 크리스천과 결혼할 때는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좁은 길을 가려는 걸 아셨는지, 그저 편안하고 쉬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한때는 결혼 대신 저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고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집을 꺽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졌지만, 결혼 후에는 단 한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미생 기술원 설립을 위해 기와집도 마련해주시고 재산의 대부분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운영이 장기간 계속되니 경영이 쉽지 않았습니다.여섯 명으로 시작한 아이들 숫자가 빠르게 늘었습니다.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데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먹는 것은 우리 부부가 어떻게든 노력하고 함께 일하면서 채워 나갈 수 있었지만, 새로운 부지를 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선교간호사님이 써준 한 통의 편지 

 

 

그 당시 동산 병원에 아일랜드에서 오신 미스 카운(한국명 고가련)이라는 선교 간호사분이 계셨습니다. 우리 아이들과 여성분들의 건강을 돌보아주고 의약품을 주시고 가시는 분이셨고, 저에게 참 다정하셨습니다.

 

하루는 고가련 선교 간호사님께 이런 힘든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잘 아는 미국 목사님이 있는데 한 번 이분에게 편지를 써서 사정을 말씀드려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에버렛 스완슨 목사님이라는 분이신데, 컴패션을 창립하고, 한국의 많은 고아원과 전쟁고아들을 돕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스완슨 목사님과의 만남

 

스완슨 목사님과 어린이

 

 

몇 달 뒤 목사님이 대구로 직접 방문을 하시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스완슨 목사님과의 첫 만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스완슨 목사님께서는 오셔서 아이 한 명, 한 명을 다 안아주시고 쓰다듬어주셨습니다. 자상하고 온유한 그 느낌이  마치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목사님은 저를 바라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더 많은 아이들을 돌보고 싶은데, 지금 있는 곳은 마을 가운데에 있어 더 이상 확장이 힘드니 고아원을 마련할 수 있는 부지를 사는 데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스완슨 목사님은 파란 눈으로 저를 응시하셨습니다그 찰나의 순간, 너무 긴장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도와줄 수 없다면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제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한 마디라도 해주시면 좋을 텐데, 심장이 마구 뛰었습니다. 

 

그때 그 분이 "네!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당연하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벼랑 끝에 서있는 것 같았는데 안도의 눈물이 속에서부터 복받쳐 올라 계속 쏟아졌습니다. 이야기가 정말 잘 풀리면 '생각해 보겠다',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 그러실 줄 알았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흔쾌히 수락하셨습니다. 

 

급한 사정을 알겠으니, 미국에 가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돈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큰 안도감이 든 것과는 별개로 문득 어떻게 이렇게 큰 도움을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하셨는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시는데, 이 돈은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열심히 일해주십시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아버지처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희망의 집 

 

 

스완슨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구입한 희망의 집부지와 건물 (1960)

 

 

 

목사님은 미국에 도착하시고 약속한 것처럼 바로 연락을 주시고 돈도 보내주습니다. 드디어 더 많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지어 이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960년 ‘희망의 집’(House of Hope)이 완공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도움으로 새로 지은  건물에서 백 명 가까이 전쟁고아들을 보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믿기지 않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기적이었습니다

 

 

 

 

희망의 집 부지 사진을 보여주는 최기숙 이사장

 

 

 

스완슨 목사님은 완공된 희망의 집에도 찾아오셨고, 저도 그 후에 목사님이 한국에 오실 때 서울에 가서 만나 뵈었습니다. 목사님이 저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해주어서 고맙다고 힘내서 열심히 잘 하라고 항상 기도하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습니다

 

십 년 후에는 시에서 하는 도시 계획 때문에 저희가 그 땅을 팔고 새로운 부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지금 희망의 집 자리입니다. 전쟁 후 대구역에 셀 수 없이 많았던 윤락여성도 많이 줄어들어 그때부터는 전쟁고아 아이들의 양육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많을 때는 150명까지 아이들을 양육했습니다.  

 

 

 

 

컴패션과 계속된 인연 

 

 

새로운 부지에서 5년이 지난 지금도 아동 양육시설로 명칭이 바뀌었을 뿐, 똑같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전쟁고아였지만 지금은 아동 학대와 방임된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1993년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도움을 받았습니다. 참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온 일대일후원자와 희망의 집 어린이와 함께

 

 

 

 

 

1970년 도시계획으로 새 부지로 이사한 “희망의 집” 공사 현장

 

 

 

아름다운 열매들

 

미생 기술원과 희망의 집을 거쳐간 아이들과 여성분들이 잘 되어서 행복하게 사시는 분들이 정말 많아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이름이나 정보를 알려줄 수 없어요.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하면, 아이들의 삶에 세상의 편견으로 인해 혹시라도 피해줄까 봐 절대로 어디에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그저 잘 살기를 항상 기도해 줍니다. 이 약속을 못 지키면 그동안 내가 해온 일은 모두 허사가 되는 거라고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스완슨 목사님을 통해 이어진 사랑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일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스완슨 목사님께서 그때 저를 붙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그때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벼랑 끝에 몰린 절대절명의 순간에 손을 잡아주셔서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은퇴하게 되어 많이 걱정하고 고민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더니 이렇게 자녀들이 일을 맡아서 하도록 준비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아버지,

제가 스완슨 목사님을 통해 받은

이 사랑 이제 세상에 알려도 되겠습니까?

 

말실수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으로 앞서지 않고

오직 주님과 스완슨 목사님 위해서 영광 돌리게,

지혜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최기숙 이사장님의 기도 

 

 


희망의 집 어린이 사진 앨범

2022년은 한국에서 시작된 컴패션이

7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한국에 부어진 사랑이 한국 땅,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꽃향기처럼 퍼져 나갔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회복지법인 미생회  최기숙 이사장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 미국인 목사가 한국에 오기를 바랐습니다.

젊은 나이에 타국에서 산화해 가는 미국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디작은 한국 전쟁 고아들이었습니다.

1952년, 전쟁 중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컴패션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1959년, 그는 전쟁 고아를 향해 같은 마음을 가진 젊은 한국인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전쟁 발발
 

 

1950년, 열 일곱 살의 저는 평안남도 여자고등부 대표 농구 선수였습니다. 

합숙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오시더니 전쟁이 났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너무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홍콩과 무역을 하는 거상이셨습니다. 지주였기 때문에 북에 남아 있다가는 생명의 위협도 컸고, 더 이상 무역일을 계속하실 수도 없었습니다. 

 

11월 말에 아버지는 이제 여기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으니 남으로 내려가자고 하셨고, 그 당시 패잔병들이 여자 피난민들을 끌고 가거나 괴롭힌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서 저는 어머니 옷을 입고, 나이 든 행색을 하고 아버지와 함께 먼저 피난 길에 올랐습니다. 

아버지가 항상 저를 꼭 붙들고 먼저 앞서서 가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검문소의 크리스마스 

 

 

대동강을 건너 한 달여간을 걸어서 간신히 서울에 도착했는데 검문소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신분 확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저를 수상하다고 통과를 안 시켜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통과시켜 달라고 거듭 빌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불현듯 머리 속에 노래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는데, 북에서 살 때 숙모님이 교회에 같이 가자고 하자고 하셔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한 번씩 가곤 했었는데 그때 들었던 노래가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검문소의 군인이 노려보며 아버지와 저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그 순간, 너무 무서웠지만 왠지 꼭 그 찬양을 불러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차올랐지만 용기를 내어, 크리스마스 노래를 불러도 되겠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검문소의 군인들의 차갑게 얼어붙은 눈빛이 순간적으로 잠깐 동안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을 정말 믿는지, 부를 수 있다면 한 번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눈을 꼭 감고 덜덜 떨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옆에서, 저는 숙모님과 크리스마스 때마다 교회에 가서 들었던 바로 그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저는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성탄절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아시아의 예루살렘

그곳에서 만난 예수님 

 

1950년 대구역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육군 기마 부대 

© 대구근대사 박물관 All rights reserved

 

서울에서 대구까지는 화물열차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화물열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하니 정확히 1월 1일이었습니다.

 

대구에서 저는 스무 살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스물세 살에 청년부 리더였던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부모님과 네 형제들은 모두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저만 남편과 함께 대구에 정착했습니다. 그 당시 대구는 부흥운동으로 수많은 집회가 열렸고, 사람들은 대구를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대구역에는 윤락여성이 정말 많았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청년부 성도들과 함께 대구역 앞의 윤락여성들을 자주 만나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구해달라고 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사연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전쟁고아가 되었는데, 밥을 굶고 있는 어린 형제자매들을 한 끼라도 먹이기 위해 대구역 앞에 나와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직후라 그 당시에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고 일자리도 흔치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1950년 대구역

© 대구근대사 박물관 All rights reserved

 

 

신혼집이 세 채가 필요했던 이유 

 

 

나란히 붙어있는 기와집 세 채를 신혼집으로 구했습니다. 우선 급하게 이들과 함께 살면서 올바른 삶으로 이끌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고민 끝에 윤락여성 선도사업이라고 해서 '미생() 기술원' 을 설립해서 집 하나는 사무실로 쓰기로 하고, 우선 여섯 명의 여성들을 대구역에서 데려왔습니다. 나머지 두 집에서 이들과 함께 자고 생활하면서 이들이 좋은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재봉틀 쓰는 법, 옷을 만드는 법 등을 가르쳤습니다. 직장도 보내주고, 많은 여성들을 후원했습니다.  

 

아버지가 북에서 나올 때 급하게 금괴를 들고 오셨었는데, 아버지는 금괴를 팔아 기와집과 부대시설까지 마련해주시고, 친정식구들과 함께 딸이 "미생 기술원"을 설립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미생이라는 뜻은 새롭게 아름다운 삶을 살자는 의미에서 남편이 지었습니다

 

이들은 저에게 '우리만 여기서 편하게 있을 수 없으니 동생들을 데려올 수 없는지' 물었고 저와 남편은 흔쾌히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고 윤락여성들이 새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랑 나이 차이가 몇 살 나지 않는 아이들이나 여성들도 저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저의 소원 중 하나는 하루빨리 나이가 드는 것이었습니다. 옷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옷만 있었습니다.  

 

 

 

미생 기술원 그리고 벼랑 끝

 

 

어려운 일들 다 말해서 무엇합니까? 수없이 어려운 일들이 닥쳤고 양식이 떨어질 때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먹을 것이 다 떨어졌는데 너무 급해서, 결혼 때 해왔던 혼수 이불과 옷들을 팔러 인근의 칠성 시장에 리어카를 끌고 나갔는데, 장물인지 알고 아무도 사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멀리 다른 시장까지 가서 밀가루와 음식 몇 가지와 바꿔서 왔습니다. 모두가 굶고 있어서, 헐값이었지만 약간의 양식하고라도 어떻게든 바꾸어야 했습니다. 배불리 먹는 것부터가 참 쉽지 않은  때였지요. 

 

그래도 신앙의 결단으로 어떠한 난관이 있다 하더라도 이 길을 가겠다는 각오와 믿음이 확고 했고, 남편과 함께 이 길을 걸었기 때문에 고생스럽다고 느낄 새 없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아버지, 그리운 나의 아버지  

 

운영이 너무 어려워질 때면 서울로 아버지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친정에 가면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저를 조용히 따로 불러서 운영자금으로 쓰라며 돈을 주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정말 사랑해 주셨지만, 크리스천과 결혼할 때는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좁은 길을 가려는 걸 아셨는지, 그저 편안하고 쉬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한때는 결혼 대신 저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고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졌지만, 결혼 후에는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미생 기술원 설립을 위해 기와집도 마련해주시고 재산의 대부분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운영이 장기간 계속되니 경영이 쉽지 않았습니다. 여섯 명으로 시작한 아이들 숫자가 빠르게 늘었습니다.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데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먹는 것은 우리 부부가 어떻게든 노력하고 함께 일하면서 채워 나갈 수 있었지만, 새로운 부지를 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마음의 결심하고는 다르게 운영의 한계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선교간호사님이 써준 한 통의 편지

 

그 당시 동산 병원에 아일랜드에서 오신 미스 카운(한국명 고가련)이라는 선교 간호사분이 계셨습니다. 우리 아이들과 여성분들의 건강을 돌보아주고 의약품을 주시고 가시는 분이셨고, 저에게 참 다정하셨습니다.

 

하루는 고가련 선교 간호사님께 이런 힘든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잘 아는 미국 목사님이 있는데 한 번 이분에게 편지를 써서 사정을 말씀드려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에버렛 스완슨 목사님이라는 분이신데, 컴패션을 창립하고, 한국의 많은 고아원과 전쟁고아들을 돕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스완슨 목사님과의 만남  

 

스완슨 목사님과 어린이 

 

 

몇 달 뒤 목사님이 대구로 직접 방문을 하시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스완슨 목사님과의 첫 만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스완슨 목사님께서는 오셔서 아이 한 명, 한 명을 다 안아주시고 쓰다듬어주셨습니다. 자상하고 온유한 그 느낌이  마치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목사님은 저를 바라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더 많은 아이들을 돌보고 싶은데, 지금 있는 곳은 마을 가운데에 있어 더 이상 확장이 힘드니 고아원을 마련할 수 있는 부지를 사는 데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스완슨 목사님은 파란 눈으로 저를 응시하셨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 너무 긴장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도와줄 수 없다면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제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는 한 마디라도 해주시면 좋을 텐데, 심장이 마구 뛰었습니다. 

 

그때 그 분이 "네!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당연하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벼랑 끝에 서있는 것 같았는데 안도의 눈물이 속에서부터 복받쳐 올라 계속 쏟아졌습니다. 이야기가 정말 잘 풀리면 '생각해 보겠다',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 그러실 줄 알았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흔쾌히 수락하셨습니다. 

 

급한 사정을 알겠으니, 미국에 가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돈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큰 안도감이 들었지만, 문득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런 큰 도움을 되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하셨는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시는데, 이 돈은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열심히 일해주십시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아버지처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희망의 집

 

 

목사님은 미국에 도착하시고 약속한 것처럼 바로 연락을 주시고 돈도 보내주셨습니다. 드디어 더 많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지어 이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960년 ‘희망의 집’(House of Hope)이 완공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도움으로 새로 지은  건물에서 백 명 가까이 전쟁고아들을 보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믿기지 않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기적이었습니다

 

 

 

스완슨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구입한 희망의 집부지와 건물 (1960)

 

 

 

 

희망의 집 부지 사진을 보여주는 최기숙 이사장

 

 

 

스완슨 목사님은 완공된 희망의 집에도 찾아오셨고, 저도 그 후에 목사님이 한국에 오실 때 서울에 가서 만나 뵈었습니다. 목사님이 저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해주어서 고맙다고 힘내서 열심히 잘 하라고, 항상 기도하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습니다

 

십 년 후에는 시에서 하는 도시 계획 때문에 저희가 그 땅을 팔고 새로운 부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지금 소망의 집 자리입니다. 전쟁 후 대구역에 셀 수 없이 많았던 윤락여성도 많이 줄어들어 그때부터는 전쟁고아 아이들의 양육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많을 때는 150명까지 아이들을 양육했습니다.

   

 

 

컴패션과 계속된 인연

 

새로운 부지에서 5년이 지난 지금도 아동 양육시설로 명칭이 바뀌었을 뿐, 똑같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전쟁고아였지만 지금은 아동 학대와 방임된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1993년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도움을 받았습니다. 참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온 일대일후원자와 희망의 집 어린이와 함께

 

 

 

1970년 도시계획으로 새 부지로 이사한 “희망의 집” 공사 현장

 

 

 

 

아름다운 열매들

 

미생 기술원과 희망의 집을 거쳐간 아이들과 여성분들이 잘 되어서 행복하게 사시는 분들이 정말 많아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이름이나 정보를 알려줄 수 없어요.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하면, 아이들의 삶에 세상의 편견으로 인해 혹시라도 피해줄까 봐 절대로 어디에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그저 잘 살기를 항상 기도해 줍니다. 이 약속을 못 지키면 그동안 내가 해온 일은 모두 허사가 되는 거라고 다짐하며 살았습니다.  

 

 

 

 

스완슨 목사님을 통해 이어진 사랑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일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스완슨 목사님께서 그때 저를 붙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그때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벼랑 끝에 몰린 절대절명의 순간에 손을 잡아주셔서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은퇴하게 되어 많이 걱정하고 고민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더니 이렇게 자녀들이 일을 맡아서 하도록 준비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아버지,

제가 스완슨 목사님을 통해 받은

이 사랑 이제 세상에 알려도 되겠습니까?

 

말실수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으로 앞서지 않고

오직 주님과 스완슨 목사님 위해서 영광 돌리게,

지혜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최기숙 이사장님의 기도 

 

 


희망의 집 어린이 사진 앨범

 

 

 

댓글
0 / 300자
  • aakerkim
    2022-03-11 19:45:12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배풀어야 할 때인것 같습니다. 조용히 실천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 itmaybetoday
    2022-03-11 13:00:47

    (롬 13:8) 모든 것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시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진정한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해 주신 이처럼 귀한 믿음의 선배님들 덕분에, 현재와 같은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늘 기억하며, 번영할수록 은혜에 익숙해져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되길 기도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ulim225
    2021-07-08 19:31:50

    이름 그대로 우리나라에 희망이 되어준 '희망의 집'과 최기숙 이사장님 그리고 스완슨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일을 모두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드립니다!

  • gkim11
    2021-07-07 20:48:38

    희망의 집에서 전쟁후 버려진 많은 아이들에게 희망의 씨를 심어주신 최기숙 이사장님의 삶과 헌신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인간이 보기에도 이렇게 감동적인데 하나님보시기엔 얼마나 큰 기쁨일까요?

  • thyhand
    2021-06-28 17:18:31

    한 분의 놀랍고 귀한 헌신을 엿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크고 놀라움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최기숙 님에게 정말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고, 이 이야기를 전해 주셔서 또 감사합니다

  • chacha95@korea.com
    2021-06-27 23:25:43

    하나님의 일하심이 놀랍고 가슴 벅찹니다~ 저도 조금이나마 닮아가는 삶 살고 싶네요~~~

  • kristina5@naver.com
    2021-06-23 06:46:52

    정말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기를.. 자녀분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게된 것 축하드립니다.

  • merryw00w@gmail.com
    2021-06-20 09:04:06

    와 자칫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인데 글의 흡입력이 좋아서 단숨에 다 읽었어요. 읽기 쉽게 다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변에도 널리 홍보해야겠어요!

  • koosook@hanmail.net
    2021-06-19 19:25:04

    정말 감동적인 내용이에요 전쟁직후에 대구에 부흥이 일어났다는 내용은 처음 알게 되었네요. 주님이 행하신 일들이 더 널리 퍼지기를 기도합니다.

  • jsk209@naver.com
    2021-06-19 15:56:04

    검문소에서 찬양을 한 이야기, 스완슨 목사님과 희망의 집 완공 과정 등 참 감동적이네요. 이사장님의 은혜롭고 아름다운 삶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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