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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할머니의 사랑이 흐르고 흘러 김명근 후원자 2019.01.15 975


내가 어떻게 너를 더 도울 수 있을까


 

   

왼쪽부터-페루의 세르히오(8세 당시), 김명근 후원자(컴패션 후원 받을 초기), 김명근 후원자의 후원자이었던 헬렌 할머니(미국).

 

세르히오(Sergio)가 어느덧 컴패션을 졸업한다고 합니다. 2009년, 첫 번째 날아온 세르히오의 사진은 김명근 후원자의 어릴 적 사진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그렇게 10년 가까운 사랑을 보내주었습니다. 이 사랑은 김명근 후원자 자신이 어린 시절, 헬렌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입니다.

 

“어떻게 내가 너를 도와줘야 네가 잘 클 수 있니.”

 

후원해주는 것도 감사한데 헬렌 할머니는 어리고 아팠던 자신을 위해 매일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후원자님의 사랑은 그렇게 컸습니다. 덕분에 유혹 많은 환경에서도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한평생 농협에서 농기계와 농업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어느새 올해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꿈을 꿉니다.

 

“언제 어디든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헬렌 할머니의 뜻을 받들어서 나갈 수 있기를. 저는 지금 그런 꿈을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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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할머니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헬렌 할머니요? 할머니죠! 제 진짜 할머니!

 

보육원 이름은 향림원이고 컴패션 어린이센터 번호는 K-89번이었죠. 위로 형 둘, 아래 동생 있었는데 제가 작게 태어난데다 몸도 약했어요. 형편이 너무 안 좋아서 저랑 동생을 보육원에 보내셨죠. 동생은 못 견디고 도망쳤어요. 교회에 가면 주일학교에서 작은 형이 ‘야, 명근아! 명근아!’ 불렀어요. 그런데 형편이 안 되는 걸, 제 자리가 없을 텐데, 가서 뭐하겠어요. 그냥 나는 보육원에 있겠다 했죠. 그렇게 후원을 받았어요.

 

컴패션 도움 많이 받았죠. 초등학교 때 후원자님이 보내주신 넥타이 매고 다녔어요. 애들이 엄청 부러워했어요. 학교도 다니고, 선물 상자도 주기적으로 받았어요. 공책, 색연필, 연필깎이, 지우개 상자에 딱딱 들어 있었어요. 얼마 전까지 보관해 놨었는데 찾아보니 없는 거예요. 서운해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어릴 때, 제가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피부병도 있었고 쓰러지기도 했죠. 컴패션 덕분에 병원비에 수술비도 받았다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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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받았던 선물 상자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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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어린이들에게 ‘겨울 옷 보내기 프로그램(COMPASSION WARM PROGRAM)’을 펼쳤던 컴패션. 국제컴패션에 보관된 향림원 어린이들 사진. 1972년 사진.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떤 선물이 올까, 기대하곤 했어요. 작은 선물이 오면 우리끼리 그랬어요. ‘너는 스폰서 별로 안 좋아, 나는 더 좋아.’ 편지에서 선물금 얼마 보낸다고 써 주시잖아요. 2불, 3불, 5불. ‘나 10불 받았어!’ 누군가 자랑하고. 어린 마음에 쪼꼬만 거 오면 서운한 거예요. 사진 찍을 때도 누구는 볼펜 한 자루 갖고 찍고, 누구는 쫙- 펼쳐 놓고 찍고. 지금은 크리스마스 선물금이 공평하게 나눠져서 가잖아요. 그거 잘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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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때 컴패션에서 찍은 성장사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기를 쓰고 있어요. 일기 보면 편지 쓰기 싫다고 쓴 데가 많아요. 뭐라고 써야 할지 막막해 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오셔서 ‘메리(개 이름)’가 새끼 낳은 거 써. 그러면 얼른 ‘메리가 새끼를 여섯 마리 나서 사나워져서 물고 다녀요.’ 이런 거 쓰고 그랬죠.

 

컴패션이 좋았던 게 유치부, 중고등부마다 성경공부 책이 있었어요. 나이에 맞게 책이 나왔죠. 어릴 때, 제가 대표기도도 하고 그랬어요. 기도 잘한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죠. 신앙으로 해서 지금까지 갈 수 있었던 것, 이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헬렌 할머니는 저만 후원한 게 아니에요. 세계 여기저기에 많이 후원했어요. 향림원에서도 저뿐 아니라 누나 한 명도 후원하셨죠. 누나는 미국 사는데 지금도 연락해요. 헬렌 할머니는 저희 만나러 한국에도 오셨어요. 혼자서 오셨죠!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던 게 기억납니다. 이억만리 저를 보러 온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거예요. 호텔에서 같이 자고 구경 가고. 제가 아프니까 건강에 대한 걱정도 많이 해주셨죠.

 

보리밥도 못 먹던 시절인데, 제가 무슨 꿈이니 희망이 있었겠어요. 그냥 먹고 살 걱정, 서울 올라가서 돈 벌어야겠다 그런 생각밖에 없었죠. 저와 같은 아이들, 세계 곳곳에 사랑을 베풀었던 헬렌 할머니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죠.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얼마든지 삐뚫어질 수 있는 환경에 있었지만 헬렌 할머니를 생각해서 마음을 다잡았죠. 고등학교 때 아침저녁으로 신문 돌리면서 공부한 덕분에 컴패션 졸업하고 대학도 합격했죠.

 

헬렌 할머니 소식은 그후에 컴패션 통해 들었어요. 91세에 돌아가셨다고. 미국에 한 번 오기를 바라셨는데, 결국 못 갔어요. 그 날 엄청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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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할머니에게 보육원에서 함께 후원 받은 누나와 나.



 

비전 따라 연결되고 연결되어

 

76년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보육원을 나가야 했습니다. 그때는 대학에 합격을 했어도 학비를 대주거나 하지 않았어요. 충남대학교에 합격하고도 갈 수 없었죠. 그래도 일하면서 공부는 원없이 했어요. 방송통신대학에서 4년만에 졸업하고 고등학교 때 은사 선생님이 교수님으로 계신 공주대학교 대학원도 졸업했어요. 진짜 바빴죠.

 

받은 사랑이 있는데 뭐라도 해야 비전이 보이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4H활동이나 농업기술 교육도 참석했어요. 그러다 다시 컴패션과 만났죠. 7,80년도에 컴패션이 거택구호 사업을 했어요. 결연 외 지역을 돕는 건데 후원자가 10불씩 해서 여기저기 많이 도왔어요. 금산에서도 거택구호사업이 벌어졌어요. 열심히 함께 했죠. 덕분에 지역도 발전하고 그 중심에 있던 추부교회도 함께 컸어요. 컴패션이 예배 같이 드리고 주민들 건강검진, 해충약 나눠 주기 등도 하고 아이들 사시 교정 등도 해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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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국제컴패션 자료. 1:1결연 외 다양한 사업을 벌인 기록들. 그중 지역 주민과 어린이를 도왔던 거택구호에 대한 자료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때 4H 경험으로 4H충남대회에서 농업 기구분야에서 1등하고 전국에서 3등했습니다. 이게 다시 92년도 코이카와 함께 사우디까지 갈 수 있도록 연결되었죠. 어릴 때 꿈이 선생님이었는데 사우디에서 기술을 가르치는 것으로 꿈을 이룬 셈입니다. 이때 터키에 계시는 선교사님하고 둘이 선교하러 하루에 8백키로를 다녔어요. 딱 한 명 전도하긴 했네요. 지금도 휴가 때마다 단기 선교로 라오스며, 네팔에 갑니다. 교회 청년들하고 강당 페인트칠이나, 수리도 하죠. 가면 너무 열악해요. 간절함이 눈에 보여요. 고민이 많았어요. 다 돕고 싶어서요.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한 사람이라도 책임지자! 컴패션 후원하는 이유예요. 제가 그렇게 후원 받았잖아요.

 

살면서 이러다 죽을 것 같다고 여겨질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의에 빠질 새도, 다른 길로 엇나갈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포기하지 않았기에, 갈 수 있던 어떤 길이 보이더군요. 헬렌 할머니를 통해서, 컴패션을 통해서, 연결되고 연결되는 길이었습니다. 제가 사우디 갈 생각을 어떻게 했겠어요? 계속 비전이 서로 연결이 되었으니까 가능했던 것이죠. 이젠 하나님의 섭리가 보여요. 아, 하나님이 계획한 거구나, 자다 꿈 속에서도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감사 드리곤 합니다.



 

벌써 졸업!

 



 

세르히오가 벌써 졸업이더라고요. 헬렌 할머니가 해준 것에 비하면 전 소홀한 데가 있죠. 직접 가서 만나고 싶었는데 가지도 못하고. 은퇴하면 꼭 가보고 싶어요.

 

사실 후원하기 전, 컴패션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방송에 차인표 씨가 나와서 컴패션을 얘기하길래, 그제야 다시 들어온 걸 알았고, 바로 전화했습니다. 멕시코나 페루에 한 번 가보고 싶어서 만나러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 쪽 어린이로 해달라고 했어요. 은근히 여자 아이를 기대했는데 남자 아이와 연결되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니까 별 고민 없이 후원했습니다.

 

세르히오가 공부도 잘하고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고 들었어요. 매일 세르히오의 꿈이 이뤄지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세르히오를 생각하면 또 마음이 가는 분들이 있는데, 현지 어린이센터 직원들입니다. 거택구호를 하면서 보니 컴패션 직원들이 정말 고생 많이 하더라고요. 애 한 명 위해서 눈이 펑펑 쏟아지는 먼 길도 마다 하지 않고 가는 것을 봤거든요. 세르히오의 어린이센터도 후원하고 싶었죠. 한 번은 세르히오가 있는 어린이센터 센터장님께 편지가 왔더라고요. 이러저러해서 컴패션 담당하게 되었다, 감사하다고. 그런 건 처음 받아봤어요. 정말 감동받았어요. 이런 편지 쉽지 않잖아요. 센터를 위해 조금씩 저축을 했죠. 100만원이 되면 찾아가서 세르히오도 만나고 센터에도 전해주자고 마음 먹었죠. 얼마 안 있으면 다 채우는데 아이가 졸업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벌써 이렇게 컸구나, 아쉬웠어요. 헬렌 할머니는 나를 위해 보러 오셨었는데 못 가서 미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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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 살지 마라

 

헬렌 할머니가 이역만리에서 매일 기도해 주셨다면 제 곁에서 저를 끌어안고 기도해 주신 분이 계세요. 향림원 원장님이신 최병운 장로님, 박강래 권사님 부부이시죠. 지금도 이분들과 함께 교회 다니고 있어요. 헬렌 할머니가 할머니면, 이분들은 부모님이시죠. 저는 이분들 덕분에 제가 모태신앙이라고 여겨요.

 

권사님은 아픈 저를 위해 보약을 엄청나게 해주셨어요. 그때 당시에 일반 가정에서도 한약 먹기 힘들었거든요. 저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곤 했죠. 제 평생 가르침도 장로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장로님은 ‘내가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은 아니지만, 남한테 가서 손가락질 받지는 말고 살아라.’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도 제가 아들딸들에게 하는 말이 되었죠. 결혼도 권사님 통해서 했어요. 사우디 다녀왔을 때, ‘너를 위해 기도하면서 부인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다고 하시면서 사랑스러운 아내를 소개해 주셨죠. 이 때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 딱 두 번 만나고 결혼했어요. 제 은인이세요.


 

더욱 바빠질 예정 중인 은퇴 이후


사이버대학교 다니면서 노인복지 배웠어요. 시골 교회 평균 연령이 60이 넘어요. 제가 청년이죠. 교회에서 노인대학교 하면 많이들 오십니다. 할 일이 많아요. 그밖에 교회 선교회나 노회에서도 일이 많습니다. 아내가 보육원 시무국장이어서 그런지 그쪽도 관심 많죠. 딸애도 언어치료사거든요. 아들은 아직 학생이고요. 라오스랑 아프리카에서도 은퇴 후 와달라고 제안을 받고 있습니다.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해요. 기계 쪽이라서 가르치고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어디로 갈지 고민 중이에요. 헬렌 할머니가 주신 사랑이 결국 비전이 되어 이렇게 또 연결되고 있는 것이죠.

 

저 보고 재밌게 산다고 그래요. 재밌게 산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큼 고통을 이겨낸 거라고 봐요. 저 같은 경우, 그 가운데 항상 하나님이 계셨어요. 나의 생명이신 하나님이 컴패션이라는 단체를 통해서 많은 일들을 해주셨고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셨죠. 늘 동행해 주셔서 제가 갈 수 없었던, 생각도 못했던 길들을 열어 주셨어요. 제게 기술과 선교는 항상 붙어 다녀요. 이것을 한 가지로 이야기하면, 사랑이에요. 제가 받은 사랑, 배로 베풀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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