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스토리

나의 살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

  • 작성일 2013-11-27
 
희망이 그곳에 있다면
 
하루를 마무리할 때 우리 가족은 방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제가 기타를 치면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는 지휘를 하시며 화음을 넣으셨는데, 언제나 두 분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곤 했어요. 그때가 가장 그립습니다.”
 
강승범(가명) 후원자는 지난 2011년 북한에서 나와 1년이 넘게 태국, 라오스 등 일명 ‘탈북 루트’를 거쳐 대한민국에 들어왔습니다. 이 곳에서의 시간도 어느새 2년이 되어갑니다.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절박함에 강 후원자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고위직 간부였던 부모님 덕분에, 강 후원자는 학교에서 반장을 하며 굶는 친구들을 챙길 만큼 생활이 여유로웠습니다. 그런 집안 사정이 급격히 기운 것은 부모님이 모함을 당하면서부터였습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럽기만 했습니다. 조금만 국가에 대해 불평만 해도 잡혀 들어갈 만큼 살얼음판 같던 그곳에서 동료의 모함에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사형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충격으로 부모님은 몸져누우셨고, 생활이 궁핍해져 가구며 살림살이를 전부 내다 팔아야 했습니다. 15살이었던 제가 먹을 거리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서야만 했어요. 3년을 죽도록 일했지만,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불법도 저지르게 되고 그러다 죽도록 맞기도 하고 고문도 당하며 점점 악에 받쳐갔습니다. 마음이 지쳐만 갔습니다. 그렇게 충성을 했던 부모님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곳이,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손, 발이 묶인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북에 있는 젊은이들이 마약을 많이 해요. 현실이 절망스러우니까요. 저도 그랬어요. 사람이 꿈을 꿀 수 없으니까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처럼 황폐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발각되면 처형을 당하는데도, 현실을 잊어보려고 남한 드라마를 몰래 봅니다. 저도 보면서, 열심히 일한 만큼 돈도 벌고 공부도 하는 저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어머니께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저 중국에 갈게요.” 속으로는 한국에 갈 계획이었어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결정이었지만 꼭 가서 꿈을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 부모님도 모셔올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국에 친척이 있다는 친구와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강물에 몸을 던지고 미친 듯이 수영을 해서 조선족 마을에 들어갔어요. 도와달라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데, 한결같이 ‘들어오면 죽이겠다’며 위협하고 내쫓아서 너무 무서웠어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문을 두드렸던 집에서 남한에 연락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브로커와 연결되어 태국, 라오스를 거쳐 1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발이 부르트도록 산길을 걷고 공안에게 잡힐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땐 하나님에 대해 몰랐지만 자연스레 하나님을 부르게 되더라고요. ‘저를 한국에 무사히 가게 해주세요. 그럼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나가네요. 아직 젊어서 그런지 적응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 외로울 때 너무 힘들어요. 명절이 되면 갈 데가 없어요. 저는 여기에 정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거든요. 거리가 썰렁해지고 단칸방에 혼자 있으면 별생각이 다 듭니다. 부모님이 그리워서 하염없이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어요. 주변에 탈북한 친구들은 환상을 좇아 이곳에 왔는데 희망이 안 보이니까 나쁜 길로 많이 빠지기도 해요. 자살까지 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마음을 다잡게 도와주는 분이 있어요. 저희 대안학교 선생님이에요. 우리를 가르치면서 결혼도 안 하시고 기숙사에서 저희와 함께 사시는 분이에요. 그렇게 헌신하시는 선생님 사랑에 엇나가는 마음을 다 잡고는 합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컴패션 영상을 보여주셨어요. 그 영상을 보고 저를 비롯해서 다들 엄청 울었어요. 다리 없이 태어난 어린이가 갖은 역경을 딛고 수영선수가 되고, 후원어린이에게 의족을 물려주고···. 정말 감동이었어요. 저도 역경을 이기고 누군가에게 그런 든든한 사랑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공부하는 게 힘들어 때론 제가 바보 같이 여겨지고, 꿈이 뭔지도 안보여서 다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였는데, 영상을 보는 순간 정신이 확 들더라고요. ‘그래,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고 이곳까지 이끌어주셨는데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어!’
 
그래서 곧바로 한 어린이를 후원하기로 했어요. 주변에서 ‘돈도 없으면서 무슨 어린이를 돕냐’며 힘드니까 나중에 하라고 말리기도 했지만, 꼭 하고 싶었습니다. 탈북할 때 지났던 태국 산길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는 어린이들을 본 기억이 있어요. 북한 어린이들 모습과 다를 바 없어서, 꼭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래서 그런 어린이들에게 힘이 돼 주고 싶었어요. ‘세상 사는 게 만만치 않지만, 우리 함께 힘을 내보자!’하면서, 그 아이에게도, 저 스스로에게도 말해주고 싶었어요.”
 
 
* 후원어린이 카윈폽과 어린이가 보낸 편지
 
강승범 후원자는 태국에 살고 있는 3살 된 카윈폽(Kawinphop)의 형이 되었습니다. 한 달 35만원의 생활 지원금 중 일부를 북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고 있는 강 후원자에게 4만 5천 원의 돈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한 어린이가 살아가는 데 부족하지는 않냐고 걱정을 하며, 어린이의 손을 더욱 꼭 붙잡습니다.
 
“‘후원금이 정상 출금되었습니다. 어린이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라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뿌듯하더라고요. ‘나로 인해 한 생명이 살아나고 있구나.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의 동생이구나’하는 마음에 오히려 힘이 났어요. 카윈폽을 만나러 꼭 태국에 다시 갈 거예요. ‘탈북 루트’였던 태국에서 나올 때와 다시 그곳에 돌아갈 때의 제 모습은 달랐으면 좋겠어요. 카윈폽을 만날 때 당당하고 멋진 형이 되고 싶어요.”
 
길을 잃었을 때
 
부모나 가족을 북에 두고 온 사람들 대부분은 매일 밤 편안하게 잠들지 못합니다. 두고 온 가족이 굶지는 않았는지, 병들지는 않았는지, 잡혀가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을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강승범 후원자는 부모님이 감옥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 죄책감에 밥도 삼키지 못하고, 폐인처럼 집안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왜 이렇게 살아가기가 힘이 드는 것인지,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길을 잃은 것처럼 무섭고 두려웠던 밤들마다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 때마다 학교 선생님과 교회 성도들이 강 후원자를 찾아와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위로하고 다독이며 함께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믿기 힘든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이 풀려나셨다는 거예요. 무릎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이건 기적이었어요. 지금의 북한 정세 속에 부모님이 풀려나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제가 살아서 두만강을 건넌 것도, 가족친지 하나 없는 남한에서 학교에 다니고 많은 분들의 사랑과 격려 속에 살아가는 것도, 무엇 하나 기적 아닌 게 없다는 걸요. 하나님께 감사를 넘어 죄송하더라고요.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제가 기도한 것 이상으로 응답해 주시는데, 저는 너무 쉽게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요. ‘하나님께서 진짜 내 삶에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꿈을 찾고 있어요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강 후원자는 그 마음을 그대로 카윈폽에게 흘려 보냅니다.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밤이면 카윈폽에게 편지를 씁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진심을 담아 써 내려가는 글 속에는 따뜻한 응원과 격려가 듬뿍 담겨있습니다. 카윈폽에게 보내는 마음인 동시에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카윈폽, 힘이 들 때는 그냥 웃어봐. 활짝 웃고 나면 힘이 날 거야. 형이 너를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내라, 내 동생!’
 
이번에 대학에 합격했어요. 목숨 걸고 넘어온 이 곳에서 대학이라는 곳에도 들어가게 되고···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일들이 현실이 된 기적이, 카윈폽의 삶에도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매일 밤 북에 계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카윈폽을 위해서도 기도해요. 가난 때문에 꿈을 잃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계속 지켜주고 싶습니다.”

 
* 강승범 후원자가 쓴 편지와 직접 그린 그림
 
어린 나이에도 수 많은 고비를 넘어온 강승범 후원자는 가난이 주는 고통과 꿈꿀 수 없는 절망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 가운데 다시 일어서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강 후원자는,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꼭 붙잡고 받은 사랑과 다시 찾은 꿈을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혼자 있는 밤이면 부모님과 함께 불렀던 노래를 불러요. 그러다 잠이 들면 고향에 가는 꿈을 꿉니다. 캄캄한 밤하늘처럼 내 미래가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 같은 일들을 통해 저를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걸 알려주세요. 아직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진 않을 거예요. 확신이 있으니까요.”
 
이번 겨울, 강 후원자는 특별한 여행을 떠납니다. 미국 곳곳을 돌며 북한의 현실을 알리고,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여정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걸어온 굴곡 많은 하루하루가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음을, 자신만을 향한 특별한 계획이 준비되어있음을 깨달아 가며, 강 후원자는 자신이 체험한 사랑과 은혜를 자신과 꼭 닮은 동생 카윈폽을 비롯해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고 있습니다. 희망을 좇아 넘어온 이 땅에서, 자신 스스로가 희망의 씨앗이 되어 새 봄이 찾아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그곳에 있다면
 
하루를 마무리할 때 우리 가족은 방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제가 기타를 치면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는 지휘를 하시며 화음을 넣으셨는데, 언제나 두 분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곤 했어요. 그때가 가장 그립습니다.”
 
강승범(가명) 후원자는 지난 2011년 북한에서 나와 1년이 넘게 태국, 라오스 등 일명 ‘탈북 루트’를 거쳐 대한민국에 들어왔습니다. 이 곳에서의 시간도 어느새 2년이 되어갑니다.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절박함에 강 후원자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고위직 간부였던 부모님 덕분에, 강 후원자는 학교에서 반장을 하며 굶는 친구들을 챙길 만큼 생활이 여유로웠습니다. 그런 집안 사정이 급격히 기운 것은 부모님이 모함을 당하면서부터였습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럽기만 했습니다. 조금만 국가에 대해 불평만 해도 잡혀 들어갈 만큼 살얼음판 같던 그곳에서 동료의 모함에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사형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충격으로 부모님은 몸져누우셨고, 생활이 궁핍해져 가구며 살림살이를 전부 내다 팔아야 했습니다. 15살이었던 제가 먹을 거리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서야만 했어요. 3년을 죽도록 일했지만,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불법도 저지르게 되고 그러다 죽도록 맞기도 하고 고문도 당하며 점점 악에 받쳐갔습니다. 마음이 지쳐만 갔습니다. 그렇게 충성을 했던 부모님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곳이,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손, 발이 묶인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북에 있는 젊은이들이 마약을 많이 해요. 현실이 절망스러우니까요. 저도 그랬어요. 사람이 꿈을 꿀 수 없으니까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처럼 황폐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발각되면 처형을 당하는데도, 현실을 잊어보려고 남한 드라마를 몰래 봅니다. 저도 보면서, 열심히 일한 만큼 돈도 벌고 공부도 하는 저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어머니께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저 중국에 갈게요.” 속으로는 한국에 갈 계획이었어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결정이었지만 꼭 가서 꿈을 펼쳐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 부모님도 모셔올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국에 친척이 있다는 친구와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강물에 몸을 던지고 미친 듯이 수영을 해서 조선족 마을에 들어갔어요. 도와달라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데, 한결같이 ‘들어오면 죽이겠다’며 위협하고 내쫓아서 너무 무서웠어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문을 두드렸던 집에서 남한에 연락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브로커와 연결되어 태국, 라오스를 거쳐 1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발이 부르트도록 산길을 걷고 공안에게 잡힐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땐 하나님에 대해 몰랐지만 자연스레 하나님을 부르게 되더라고요. ‘저를 한국에 무사히 가게 해주세요. 그럼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나가네요. 아직 젊어서 그런지 적응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 외로울 때 너무 힘들어요. 명절이 되면 갈 데가 없어요. 저는 여기에 정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거든요. 거리가 썰렁해지고 단칸방에 혼자 있으면 별생각이 다 듭니다. 부모님이 그리워서 하염없이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어요. 주변에 탈북한 친구들은 환상을 좇아 이곳에 왔는데 희망이 안 보이니까 나쁜 길로 많이 빠지기도 해요. 자살까지 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마음을 다잡게 도와주는 분이 있어요. 저희 대안학교 선생님이에요. 우리를 가르치면서 결혼도 안 하시고 기숙사에서 저희와 함께 사시는 분이에요. 그렇게 헌신하시는 선생님 사랑에 엇나가는 마음을 다 잡고는 합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컴패션 영상을 보여주셨어요. 그 영상을 보고 저를 비롯해서 다들 엄청 울었어요. 다리 없이 태어난 어린이가 갖은 역경을 딛고 수영선수가 되고, 후원어린이에게 의족을 물려주고···. 정말 감동이었어요. 저도 역경을 이기고 누군가에게 그런 든든한 사랑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공부하는 게 힘들어 때론 제가 바보 같이 여겨지고, 꿈이 뭔지도 안보여서 다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였는데, 영상을 보는 순간 정신이 확 들더라고요. ‘그래,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고 이곳까지 이끌어주셨는데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어!’
 
그래서 곧바로 한 어린이를 후원하기로 했어요. 주변에서 ‘돈도 없으면서 무슨 어린이를 돕냐’며 힘드니까 나중에 하라고 말리기도 했지만, 꼭 하고 싶었습니다. 탈북할 때 지났던 태국 산길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는 어린이들을 본 기억이 있어요. 북한 어린이들 모습과 다를 바 없어서, 꼭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래서 그런 어린이들에게 힘이 돼 주고 싶었어요. ‘세상 사는 게 만만치 않지만, 우리 함께 힘을 내보자!’하면서, 그 아이에게도, 저 스스로에게도 말해주고 싶었어요.”
 
 
* 후원어린이 카윈폽과 어린이가 보낸 편지
 
강승범 후원자는 태국에 살고 있는 3살 된 카윈폽(Kawinphop)의 형이 되었습니다. 한 달 35만원의 생활 지원금 중 일부를 북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고 있는 강 후원자에게 4만 5천 원의 돈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한 어린이가 살아가는 데 부족하지는 않냐고 걱정을 하며, 어린이의 손을 더욱 꼭 붙잡습니다.
 
“‘후원금이 정상 출금되었습니다. 어린이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라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뿌듯하더라고요. ‘나로 인해 한 생명이 살아나고 있구나.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의 동생이구나’하는 마음에 오히려 힘이 났어요. 카윈폽을 만나러 꼭 태국에 다시 갈 거예요. ‘탈북 루트’였던 태국에서 나올 때와 다시 그곳에 돌아갈 때의 제 모습은 달랐으면 좋겠어요. 카윈폽을 만날 때 당당하고 멋진 형이 되고 싶어요.”
 
길을 잃었을 때
 
부모나 가족을 북에 두고 온 사람들 대부분은 매일 밤 편안하게 잠들지 못합니다. 두고 온 가족이 굶지는 않았는지, 병들지는 않았는지, 잡혀가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을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강승범 후원자는 부모님이 감옥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 죄책감에 밥도 삼키지 못하고, 폐인처럼 집안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왜 이렇게 살아가기가 힘이 드는 것인지,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길을 잃은 것처럼 무섭고 두려웠던 밤들마다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 때마다 학교 선생님과 교회 성도들이 강 후원자를 찾아와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위로하고 다독이며 함께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믿기 힘든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이 풀려나셨다는 거예요. 무릎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이건 기적이었어요. 지금의 북한 정세 속에 부모님이 풀려나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제가 살아서 두만강을 건넌 것도, 가족친지 하나 없는 남한에서 학교에 다니고 많은 분들의 사랑과 격려 속에 살아가는 것도, 무엇 하나 기적 아닌 게 없다는 걸요. 하나님께 감사를 넘어 죄송하더라고요.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제가 기도한 것 이상으로 응답해 주시는데, 저는 너무 쉽게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요. ‘하나님께서 진짜 내 삶에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꿈을 찾고 있어요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강 후원자는 그 마음을 그대로 카윈폽에게 흘려 보냅니다.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밤이면 카윈폽에게 편지를 씁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진심을 담아 써 내려가는 글 속에는 따뜻한 응원과 격려가 듬뿍 담겨있습니다. 카윈폽에게 보내는 마음인 동시에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카윈폽, 힘이 들 때는 그냥 웃어봐. 활짝 웃고 나면 힘이 날 거야. 형이 너를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내라, 내 동생!’
 
이번에 대학에 합격했어요. 목숨 걸고 넘어온 이 곳에서 대학이라는 곳에도 들어가게 되고···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일들이 현실이 된 기적이, 카윈폽의 삶에도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매일 밤 북에 계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카윈폽을 위해서도 기도해요. 가난 때문에 꿈을 잃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계속 지켜주고 싶습니다.”

 
* 강승범 후원자가 쓴 편지와 직접 그린 그림
 
어린 나이에도 수 많은 고비를 넘어온 강승범 후원자는 가난이 주는 고통과 꿈꿀 수 없는 절망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 가운데 다시 일어서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강 후원자는,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꼭 붙잡고 받은 사랑과 다시 찾은 꿈을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혼자 있는 밤이면 부모님과 함께 불렀던 노래를 불러요. 그러다 잠이 들면 고향에 가는 꿈을 꿉니다. 캄캄한 밤하늘처럼 내 미래가 보이지 않고 막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 같은 일들을 통해 저를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걸 알려주세요. 아직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진 않을 거예요. 확신이 있으니까요.”
 
이번 겨울, 강 후원자는 특별한 여행을 떠납니다. 미국 곳곳을 돌며 북한의 현실을 알리고,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여정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걸어온 굴곡 많은 하루하루가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음을, 자신만을 향한 특별한 계획이 준비되어있음을 깨달아 가며, 강 후원자는 자신이 체험한 사랑과 은혜를 자신과 꼭 닮은 동생 카윈폽을 비롯해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고 있습니다. 희망을 좇아 넘어온 이 땅에서, 자신 스스로가 희망의 씨앗이 되어 새 봄이 찾아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댓글
0 / 300자
  • _
    2014-12-08 10:45:32

    멋지군요.!!!

  • _
    2014-12-07 03:02:56

    로그인 테스트

  • _
    2014-12-06 01:19:07

    아이들의 꿈을 위해

  • _
    2014-12-06 01:18:51

    멋지시네요

  • _
    2014-12-06 01:18:40

    화이팅 입니다

  • r1ch01
    2014-02-16 18:38:55

    멋지군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북한에 대해서 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도 평안남도 평양시 출생입니다. 저의 뿌리도 북한입니다. 저도 열심히 살아서 동포 북한사람들에게 조그만 기여라도 하고 싶습니다. 힘내십시오.

  • mariamkchoi
    2013-12-25 03:50:42

    승범군! 아들 셋 있는 엄마로써, 제 조부모님이 계신 곳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친밀하게 느껴지네요. 저는 미국에 살지만 북쪽에 관심이 많아요. 후원자가 된 것도 기특하고 고맙네요. 저도 현재까지 1명만 하지만 내 자식 숫자만큼 4명을 돕는 것이 목표랍니다. 이 땅을 다스리시는분은 분명히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지요. 보모님 보고 싶을 때마다, 제 아버지도 두고 온 부모님 50년 넘게 그리시다 만나지도 못하시고 천국에 가셨어요. 저도 꼭 가 보고 싶어요. 제 이멀은 mariamkchoi@yahoo.com, 꼭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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