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스토리

컴패숀 넘버 74에서 지역아동센터장으로

  • 작성일 2014-04-02
 
 
아버지께서 운영하신 순창애육원에서 컴패션의 도움으로 80명의 고아들을 돌보며 유년, 청년시절을 지내온 박진숙 후원자님. 어린이의 상처를 치유하고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양육하는 컴패션의 정신으로 현재 비전교실 지역아동센터에서 어린이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지난 3월, “너희도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어.”라며 센터 어린이들과 케냐에 사는 게오프레이의 후원자가 되어주셨는데요. 유년시절에서 중년이 된 오늘날까지 엄마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컴패션과 함께해오신 박진숙 후원자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컴패숀 넘버 74, 순창애육원 
 
할아버지 때부터 운영해오신 순창에 위치한 순창애육원에서 저희 가족은 70~80명의 한국전쟁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순창애육원은 컴패숀 넘버 74번으로, 외국에 계신 후원자님들의 지원으로 어린이를 양육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고아원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자면서 머리에 이가 옮기도 하고, 서로 잡아주며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는 고아원에서 물건이 깨지거나 망가지면 무조건 집으로 가지고 오셨어요. 새로 산 물건은 모두 고아원으로 가고요. 부모님과 육남매가 따로 놀러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었고, 아버지께서 저를 업어주신 기억도 드뭅니다. 고아원 뒷산에 고추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돌보신 어머니께서는 또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고아를 기르며 자식을 고아로 만든 아버지 
 
아버지께서 세 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고아원에 와서 어린이들을 돌봐라.” 자식들의 대학 진학, 결혼은 아버지에겐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딸들은 대학교에 안 보내도 고아원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공부시키고, 대학교에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지요. 그때 고아원에 있던 모범생 언니는 간호대학에 입학해 순창에서 보건소장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던 까불이 동생은 중고차 사장님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아버지는 뿌듯해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3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딸들은 만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해요. “아버지는 80명의 고아를 키우고 우리를 고아로 만들었다.”
 
 
부모에게 본대로 살아가는 육남매
 
아버지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성경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몸소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게 뭔지 아세요? 지금 육남매 모두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큰 언니와 남동생은 컴패션의 지원을 받던 고아원에서 현재 옥천요양원을, 큰 오빠는 장애아동 특수교사, 둘째 언니는 교회 사모이자 지역아동센터를, 언니들은 군산과 광주에서 각각 복음센터와 천혜경로원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보고, 배운 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진행된 컴패션 양육  
 
고아원 어린이들은 컴패션 후원자님이 보내주신 후원금과 제공 받은 구호물자로 생활했으며 이곳에서 먹고, 자고,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어린이 양육뿐만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가정을 위한 복지사업도 진행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어린이와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린 후, 부모님 편에 후원금을 전달했습니다.
 

 
또한 후원자님으로부터 생일 선물금이나 크리스마스 선물금을 전달받으면 아이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선물을 사주었으며, 영수증은 따로 보관해 감사를 받았습니다. 물론, 후원어린이가 선물 받은 사진을 찍어 감사 편지와 함께 후원자님께 보내드렸지요.
 
 
제가 꼬마였을 때, 컴패션 후원자이신 잉글리드 여사가 고아원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후원자와 편지로 안부를 주고 받았던 아이들은 파란 눈, 금발머리 외국인 후원자를 보며 “아, 내게 진짜 후원자가 있었구나!”하며 신기해하더라고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찔한 순간이 있습니다. 연탄으로 물을 데우던 시절이라 커다란 욕조에 열 명 남짓의 아이들을 목욕 씻기고 내보냈는데, 머리가 어지럽더라고요.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허리를 피고, 고개 드는 순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연탄가스 때문이었어요. 옆에 큰오빠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아원 선생님으로서, 언니로서 2년간 있다 보니 더 이상 아이들에게 줄 게 없더라고요. ‘몸으로 놀아주고, 돌봐주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과 사회복지, 상담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은 의외였어요. “이렇게 하면 시집 못 가. 고생스러운 일을 왜 사서 하려고 하니?” 하지만 몇 일 간에 걸쳐 금식이 아닌 굶식하는 저를 부모님께서 말리실 수는 없었습니다.



 
 
엄마의 마음으로 돌보는 지역아동센터
 
신학교 졸업 후, 경동제일교회 부목사로 섬기다 안동에서 목회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2009년 11월 1일,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교회에서 사회복지 목사로, 비전교실 지역아동센터에서 어린이 지원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 사정, 여러 가지 여건으로 교회에서 더 이상 어린이 지원사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같이 살을 비비대던 어린이들을 근동에 있는 아동센터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치 내 자식들을 뿔뿔이 내보내야만 하는 엄마 마음이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기도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신학, 사회복지, 상담까지 공부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했을 때 답은 명확했습니다. “엄마의 마음, 목사의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돌봐라!”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컴패션의 도움으로 고아원 어린이들을 돌봤던 첫 마음을 떠올리며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의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간 확보가 우선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학원 간다고 말하고 아동센터에 온다는 아이들의 말에, 보다 자유롭고 활기차게 지낼 수 있는 넓고 편안한 공간을 선물해주고 싶었습니다. 관악구 행운동 우성아파트 오르막 길을 오르니,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널찍한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여기 주세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주변 도움을 호소했지요. 물질적인 지원이 필요했기에 가능할까 싶었지만, 남편의 도움과 목사 연금에서 일부, 주변에 계신 분들 덕분에 이곳으로 이사올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베란다에서 텃밭을 가꾸고, 방송댄스, 퀼트수업, 요리, 문화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지역사회와 연계해 체육대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여는 발표회도 빠질 수 없는 주요 행사예요. 하지만 서울시와 관악구에서 받는 매달 527만 원 운영금으로, 20%는 아이들의 프로그램 비용으로 사용하고, 세 명의 선생님 월급을 주고 나면 나머지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빠듯합니다. 한 달, 한 달 기도로, 물질적으로 도와주시는 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요즘은 디지털 유목민이라고 하잖아요. “봉천동에서만 살 생각 말아라. 세계로 나가라!” 그래서 각 방 이름을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대륙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그곳에서 꿈을 펼치라는 제 바람이기도 합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보며 느낀 건,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관심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죠. 오히려 가난한 형편에 놓인 부모님은 아이에게 더 잘해 주고픈 애착이 있지만 직접 어떻게 행동하고 돌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이 많으시더라고요. 유명 메이커 잠바나 고가의 스마트폰을 사주시는 부모님도 계시지만 아이들에겐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기초수급자녀, 한 부모 자녀, 조손 자녀, 이혼가족 자녀들에겐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이 요구됩니다. 센터에서는 소아 우울증이나 내면에 분노가 많은 아이들을 위해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꿈이 없다고 얘기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제게 맡겨진 사명을 다잡게 됩니다. 지역아동센터가 신앙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더라고요. 센터장이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목사님’이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아버지가 고아원을 운영했던 마음처럼 ‘예수 정신’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게오프레이의 후원자가 된 아이들
 
형편이 나은 몇몇을 제외한 아이들은 지역아동센터를 무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지원금은 국민의 세금이고, 후원자의 도움 덕택에 무료로 이용하는 건데, 아이들이 ‘복지병’에 걸리겠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생각난 게, ‘컴패션’이었어요! 도움을 받고 있지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이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의 가정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비공개로, 100원, 500원, 1000원씩 저금통에 넣기로 했지요. “이제, 제가 후원자가 된 거예요?” 오늘 용돈을 받았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후원금을 내겠다는 아이, 언제 만날 수 있냐며 편지부터 쓰자는 아이 등 모두 들뜬 모양이었습니다. ‘아, 내가 안 가르쳐줘서 못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먼저, 아이들과 한국컴패션 홈페이지에서 후원할 어린이의 가정환경 등을 꼼꼼하게 둘러보았고, 투표 끝에 케냐에 사는 게오프레이를 후원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I am O.K. You’re O.K
 
저는 센터 아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얘기해요. “I am O.K. You’re O.K! 환경이 힘든 것이지 내가 힘든 것이 아니야. 나는 괜찮아. 나는 소중한 존재고,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요. 지금 도움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현재 또는 나중에 도와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각인시켜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케냐에 사는 우리 막둥이, 게오프레이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다는 것을 직접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고아원, 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느낀 한 가지는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복음뿐이라는 겁니다. 꿈은 돈으로, 시간으로, 남이 살 수 없는 거잖아요. 상처 입은 마음을 다독이고 재능과 꿈을 키워줄 때야 아이들은 비로소 건강하게 바로 서고, 마음껏 꿈꿀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본 컴패션 사역의 정신으로 평생 우리 주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우리의 사명을 이어가는 거겠죠?
 
 
아버지께서 운영하신 순창애육원에서 컴패션의 도움으로 80명의 고아들을 돌보며 유년, 청년시절을 지내온 박진숙 후원자님. 어린이의 상처를 치유하고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양육하는 컴패션의 정신으로 현재 비전교실 지역아동센터에서 어린이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지난 3월, “너희도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어.”라며 센터 어린이들과 케냐에 사는 게오프레이의 후원자가 되어주셨는데요. 유년시절에서 중년이 된 오늘날까지 엄마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컴패션과 함께해오신 박진숙 후원자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컴패숀 넘버 74, 순창애육원 
 
할아버지 때부터 운영해오신 순창에 위치한 순창애육원에서 저희 가족은 70~80명의 한국전쟁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순창애육원은 컴패숀 넘버 74번으로, 외국에 계신 후원자님들의 지원으로 어린이를 양육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고아원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자면서 머리에 이가 옮기도 하고, 서로 잡아주며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는 고아원에서 물건이 깨지거나 망가지면 무조건 집으로 가지고 오셨어요. 새로 산 물건은 모두 고아원으로 가고요. 부모님과 육남매가 따로 놀러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었고, 아버지께서 저를 업어주신 기억도 드뭅니다. 고아원 뒷산에 고추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돌보신 어머니께서는 또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고아를 기르며 자식을 고아로 만든 아버지 
 
아버지께서 세 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고아원에 와서 어린이들을 돌봐라.” 자식들의 대학 진학, 결혼은 아버지에겐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딸들은 대학교에 안 보내도 고아원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공부시키고, 대학교에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지요. 그때 고아원에 있던 모범생 언니는 간호대학에 입학해 순창에서 보건소장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던 까불이 동생은 중고차 사장님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아버지는 뿌듯해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3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딸들은 만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해요. “아버지는 80명의 고아를 키우고 우리를 고아로 만들었다.”
 
 
부모에게 본대로 살아가는 육남매
 
아버지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성경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몸소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게 뭔지 아세요? 지금 육남매 모두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큰 언니와 남동생은 컴패션의 지원을 받던 고아원에서 현재 옥천요양원을, 큰 오빠는 장애아동 특수교사, 둘째 언니는 교회 사모이자 지역아동센터를, 언니들은 군산과 광주에서 각각 복음센터와 천혜경로원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보고, 배운 대로 살아간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진행된 컴패션 양육  
 
고아원 어린이들은 컴패션 후원자님이 보내주신 후원금과 제공 받은 구호물자로 생활했으며 이곳에서 먹고, 자고,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어린이 양육뿐만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가정을 위한 복지사업도 진행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어린이와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린 후, 부모님 편에 후원금을 전달했습니다.
 

 
또한 후원자님으로부터 생일 선물금이나 크리스마스 선물금을 전달받으면 아이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선물을 사주었으며, 영수증은 따로 보관해 감사를 받았습니다. 물론, 후원어린이가 선물 받은 사진을 찍어 감사 편지와 함께 후원자님께 보내드렸지요.
 
 
제가 꼬마였을 때, 컴패션 후원자이신 잉글리드 여사가 고아원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후원자와 편지로 안부를 주고 받았던 아이들은 파란 눈, 금발머리 외국인 후원자를 보며 “아, 내게 진짜 후원자가 있었구나!”하며 신기해하더라고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찔한 순간이 있습니다. 연탄으로 물을 데우던 시절이라 커다란 욕조에 열 명 남짓의 아이들을 목욕 씻기고 내보냈는데, 머리가 어지럽더라고요.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허리를 피고, 고개 드는 순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연탄가스 때문이었어요. 옆에 큰오빠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아원 선생님으로서, 언니로서 2년간 있다 보니 더 이상 아이들에게 줄 게 없더라고요. ‘몸으로 놀아주고, 돌봐주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과 사회복지, 상담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은 의외였어요. “이렇게 하면 시집 못 가. 고생스러운 일을 왜 사서 하려고 하니?” 하지만 몇 일 간에 걸쳐 금식이 아닌 굶식하는 저를 부모님께서 말리실 수는 없었습니다.



 
 
엄마의 마음으로 돌보는 지역아동센터
 
신학교 졸업 후, 경동제일교회 부목사로 섬기다 안동에서 목회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2009년 11월 1일,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교회에서 사회복지 목사로, 비전교실 지역아동센터에서 어린이 지원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 사정, 여러 가지 여건으로 교회에서 더 이상 어린이 지원사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같이 살을 비비대던 어린이들을 근동에 있는 아동센터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마음이 무겁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치 내 자식들을 뿔뿔이 내보내야만 하는 엄마 마음이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기도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신학, 사회복지, 상담까지 공부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했을 때 답은 명확했습니다. “엄마의 마음, 목사의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돌봐라!”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컴패션의 도움으로 고아원 어린이들을 돌봤던 첫 마음을 떠올리며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의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간 확보가 우선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학원 간다고 말하고 아동센터에 온다는 아이들의 말에, 보다 자유롭고 활기차게 지낼 수 있는 넓고 편안한 공간을 선물해주고 싶었습니다. 관악구 행운동 우성아파트 오르막 길을 오르니,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널찍한 공간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여기 주세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주변 도움을 호소했지요. 물질적인 지원이 필요했기에 가능할까 싶었지만, 남편의 도움과 목사 연금에서 일부, 주변에 계신 분들 덕분에 이곳으로 이사올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베란다에서 텃밭을 가꾸고, 방송댄스, 퀼트수업, 요리, 문화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지역사회와 연계해 체육대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여는 발표회도 빠질 수 없는 주요 행사예요. 하지만 서울시와 관악구에서 받는 매달 527만 원 운영금으로, 20%는 아이들의 프로그램 비용으로 사용하고, 세 명의 선생님 월급을 주고 나면 나머지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빠듯합니다. 한 달, 한 달 기도로, 물질적으로 도와주시는 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요즘은 디지털 유목민이라고 하잖아요. “봉천동에서만 살 생각 말아라. 세계로 나가라!” 그래서 각 방 이름을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대륙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그곳에서 꿈을 펼치라는 제 바람이기도 합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보며 느낀 건,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관심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죠. 오히려 가난한 형편에 놓인 부모님은 아이에게 더 잘해 주고픈 애착이 있지만 직접 어떻게 행동하고 돌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이 많으시더라고요. 유명 메이커 잠바나 고가의 스마트폰을 사주시는 부모님도 계시지만 아이들에겐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기초수급자녀, 한 부모 자녀, 조손 자녀, 이혼가족 자녀들에겐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이 요구됩니다. 센터에서는 소아 우울증이나 내면에 분노가 많은 아이들을 위해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꿈이 없다고 얘기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제게 맡겨진 사명을 다잡게 됩니다. 지역아동센터가 신앙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더라고요. 센터장이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목사님’이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아버지가 고아원을 운영했던 마음처럼 ‘예수 정신’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게오프레이의 후원자가 된 아이들
 
형편이 나은 몇몇을 제외한 아이들은 지역아동센터를 무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지원금은 국민의 세금이고, 후원자의 도움 덕택에 무료로 이용하는 건데, 아이들이 ‘복지병’에 걸리겠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생각난 게, ‘컴패션’이었어요! 도움을 받고 있지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이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의 가정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비공개로, 100원, 500원, 1000원씩 저금통에 넣기로 했지요. “이제, 제가 후원자가 된 거예요?” 오늘 용돈을 받았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후원금을 내겠다는 아이, 언제 만날 수 있냐며 편지부터 쓰자는 아이 등 모두 들뜬 모양이었습니다. ‘아, 내가 안 가르쳐줘서 못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먼저, 아이들과 한국컴패션 홈페이지에서 후원할 어린이의 가정환경 등을 꼼꼼하게 둘러보았고, 투표 끝에 케냐에 사는 게오프레이를 후원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I am O.K. You’re O.K
 
저는 센터 아이들에게 항상 이렇게 얘기해요. “I am O.K. You’re O.K! 환경이 힘든 것이지 내가 힘든 것이 아니야. 나는 괜찮아. 나는 소중한 존재고,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요. 지금 도움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현재 또는 나중에 도와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각인시켜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케냐에 사는 우리 막둥이, 게오프레이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다는 것을 직접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고아원, 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느낀 한 가지는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복음뿐이라는 겁니다. 꿈은 돈으로, 시간으로, 남이 살 수 없는 거잖아요. 상처 입은 마음을 다독이고 재능과 꿈을 키워줄 때야 아이들은 비로소 건강하게 바로 서고, 마음껏 꿈꿀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본 컴패션 사역의 정신으로 평생 우리 주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우리의 사명을 이어가는 거겠죠?
댓글
0 / 300자
  • iamj621
    2014-05-16 10:28:38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복음뿐..!! 하나님께서 늘 함께해주시길~!

  • appani
    2014-05-07 17:17:00

    하시는 모든 사업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 jde0110
    2014-04-03 10:39:29

    진정 컴패션의 증인 이시네요..!!! 감격하고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명을 향해 달려가시는 훌륭한 가족 너무 아름답고 축복합니다. ^^

  • thewest
    2014-04-02 15:11:37

    컴패션 수혜국이었던 시절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정말 존경 스런 가족입니다... 이 가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실지 상상해봅니다... 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 더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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