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스토리

저는 컴패션 출신입니다

  • 작성일 2018-06-05


철거민이 사는 달동네 아래

시골에서 봇짐 하나씩 들고 부모님과 육 남매가 인천으로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남의 집살이를 하다가 당시 큰 돈이었던 2만 원으로 판자집 작은 단칸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강제 철거 당하고 갈 데가 없어진 후론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겨울 밤엔 부모님은 천막에서 지내고, 저희 남매는 남의 집에서 웅크린 채 눈을 붙였습니다.

먹을 것과 가진 것이 녹록하지 않던 시절. 근처 미군부대 쓰레기더미가 잔뜩 쌓여있는 그곳이 유일한 놀이터였습니다. 친구들과 뭔가 팔만한 것이 있으면 팔고, 먹을 것이 있으면 먹기도 했습니다. 일명 돼지죽이라고 하죠. 먹다 남은 것들을 잡탕으로 끓여 먹기도 했는데, 그마저 너무 귀해서 많이 먹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는 결석생이 참 많았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몇 달 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한 친구 집을 방문하면 대부분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가족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가 일하는 것은 가족의 생계와 생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었죠. 당시엔 어린이들이 노동 대신 학업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또 기억에 남는 학생 중에 한 명은 얼굴이 아주 새까만 거예요. 흑인처럼요. 알고 보니 몇 년간 목욕을 한번도 하지 못해 때가 굳어 그렇게 된 거였더군요.

매일 춥고 어두웠던 시절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손을 쫙 편 날이 없었어요. 공부를 하고 싶어도 글씨가 마음대로 잘 안 써졌습니다. 겨울에 방안에 들어와도 너무 추워서 손이 절로 굽더라고요. 지금도 동상에 걸린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수도 시설도 없으니 우물에서 물을 길러 지게에 지고 언덕을 오르면 쏟아진 물 때문에 금세 빙판길이 되었습니다. 집까지 올라가는 길이 어찌나 멀고 험하던지요. 그 시절 달동네 언덕이 참 높게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께서 행상을 하시며 생선, 김 등 여러 가지를 파셨습니다. 어머니께선 5원이었던 버스비를 아끼시려고 행상하고 남은 물건이 든 대야를 머리에 이고 한두 시간 거리를 걸어오셨어요. 그 모습이 아직도 제 가슴 속에 오롯이 박혀있습니다. 어머니를 대신해 뭐라도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돈을 벌 방법도,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되는지 안내해주는 사람조차 없었죠. 가슴만 턱 막힌 듯 답답했습니다.

“너 어디 아프니?
무슨 근심 있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가난에 눌려있으니 내일이 없고, 꿈과 소망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무엇을 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나를 위해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있었구나 알게 되었어요.

처음 느끼는 따뜻함

저는 여섯 남매 중 유일하게 컴패션 도움을 받았습니다. 10살이었던 저는 다니던 교회에서 컴패션 후원 어린이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인천에 있는 향진원에 가서 매달 10달러 정도의 후원금을 받았습니다. 향진원 송성준 원장님께서 제 가족상황과 일상을 물어보셨는데, 그분의 인상과 말씀이 너무 따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나도 저런 어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42년간 간직한 한 가지가 뭔지 아세요? 제 후원자님 ‘린다 프루에(Linda Frueh)’ 사진입니다. 이사를 가더라도 이 사진을 꼭 챙겼습니다. 편지에 후원자님은 자신을 메사추세츠주에서 동물을 키우며 사는 독신녀라고 소개했습니다. 언젠가 만나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세계지도에서 후원자님이 사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물질적인 도움보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이 사실 가장 고팠던 것 같습니다. 가족이 있어도 서로가 힘들었기에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가 많았죠.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 외로움. 어디 기댈 데가 없고, 기댈 꿈도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컴패션에서 누군가가 나를 알고 사랑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었겠습니까. 제게 진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고민 가운데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에 기둥이 되어야겠다, 가정을 일으켜야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당시 추앙받는 판사, 검사, 변호사를 꿈꾸며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워낙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많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뭐지?
죽으면 어떻게 되지?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어떤 관계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의미에 대한 질문이지요.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장년 예배와 다락방 구역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어른들의 세계에 참여하고 신앙적으로 안내받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중, 고등학생 때부턴 새벽예배에 나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어머니께 신학을 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게 기대가 많으셨던 어머니께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셨을 겁니다. 하나님께 아들을 빼앗겼다고까지 말씀하셨으니까요.



후원 어린이에서 후원자로

누군가는 과거 후원받거나 도움받은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나의 연약함, 부끄러움보다 그 시절 도움받은 것이 절대적으로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누군가의 기도와 후원이 없었다면 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이 안 되기 때문이죠.

“제가 컴패션 출신입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기도가 없었다면
지금 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나누고 싶은 빚진 마음이 늘 마음 한 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4년 교역자로 섬기던 교회에서 한국이 후원국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과거에 컴패션의 도움을 받았고, 후원자님의 도움 하나, 손길 하나가 제게 살아갈 힘과 용기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2004년 11월, 저는 볼리비아에 사는 리제트(Lizeth)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2017년 9월부턴 필리핀 에드마(Edmar), 크리스(Cris), 클라크(Clark)를 돕고 있습니다.




꿈은 아이가
꿈꿀 수 있도록 돕는 건 후원자가

2012년 6월 11일부터 15일, 필리핀 비전트립을 다녀왔습니다. 작은 방 한 켠에 아파서 누워있는 아버지, 그 옆에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어머니가 계셨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곳에 고개 숙인 아이는 마치 제 어린 시절 모습 같았습니다. 아이와 가족에겐 작은 희망, 소망조차 무거워 보였어요.

그런 아이 먼저, 아이 대신 우리가 아이의 꿈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현실은 절망적이고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테지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고 있다고 가슴 깊이 말해주었습니다.


컴패션을 졸업한 학생들과 찍은 사진을 지금도 자주 보곤 합니다. 사진 속 건강하고 밝게, 기쁨과 확신에 찬 표정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졸업생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후원받기 전에 얼굴에 빛도 없던 어린이들이 너무나 밝고 환하게 변한 이유는 뭘까요?

‘컴패션 안에서 계속 사랑을 공급받으니깐
어린이들이 밝게 자라는 것이구나.
후원자님들이 너무 귀한 일을 하시는 구나.’


내가 꿈꾸는 컴패션

저는 ‘컴패션’(Compassion)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 긍휼’이란 뜻이지만 한편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어요. ‘패션(passion)’이 다른 의미로는 ‘열정’을 의미하잖아요. 그런데 ‘컴(com)’이 붙어서 그 ‘열정을 나누고 함께하자’는 의미로 말입니다. 지나친 열정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힘들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교회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컴패션의 진정성과 열정을 함께 느끼고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 안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각각 우리 안에 가난한 부분까지 채우실 거라 기대합니다. 성도들은 컴패션비전트립에 참여하시고, 북한에 있는 어린이에 대한 소망을 함께 키워가고 있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을 내 가족처럼 만나 서로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아주고, 힘껏 껴안아줄 날이 머잖아 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할 때 그 땅이, 그들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사랑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빚을 지니까 제게 소망이 생기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다시 전하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니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3-10절)





철거민이 사는 달동네 아래

시골에서 봇짐 하나씩 들고 부모님과 육 남매가 인천으로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남의 집살이를 하다가 당시 큰 돈이었던 2만 원으로 판자집 작은 단칸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강제 철거 당하고 갈 데가 없어진 후론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겨울 밤엔 부모님은 천막에서 지내고, 저희 남매는 남의 집에서 웅크린 채 눈을 붙였습니다.

먹을 것과 가진 것이 녹록하지 않던 시절. 근처 미군부대 쓰레기더미가 잔뜩 쌓여있는 그곳이 유일한 놀이터였습니다. 친구들과 뭔가 팔만한 것이 있으면 팔고, 먹을 것이 있으면 먹기도 했습니다. 일명 돼지죽이라고 하죠. 먹다 남은 것들을 잡탕으로 끓여 먹기도 했는데, 그마저 너무 귀해서 많이 먹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는 결석생이 참 많았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몇 달 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한 친구 집을 방문하면 대부분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가족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가 일하는 것은 가족의 생계와 생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었죠. 당시엔 어린이들이 노동 대신 학업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또 기억에 남는 학생 중에 한 명은 얼굴이 아주 새까만 거예요. 흑인처럼요. 알고 보니 몇 년간 목욕을 한번도 하지 못해 때가 굳어 그렇게 된 거였더군요.

매일 춥고 어두웠던 시절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손을 쫙 편 날이 없었어요. 공부를 하고 싶어도 글씨가 마음대로 잘 안 써졌습니다. 겨울에 방안에 들어와도 너무 추워서 손이 절로 굽더라고요. 지금도 동상에 걸린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수도 시설도 없으니 우물에서 물을 길러 지게에 지고 언덕을 오르면 쏟아진 물 때문에 금세 빙판길이 되었습니다. 집까지 올라가는 길이 어찌나 멀고 험하던지요. 그 시절 달동네 언덕이 참 높게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께서 행상을 하시며 생선, 김 등 여러 가지를 파셨습니다. 어머니께선 5원이었던 버스비를 아끼시려고 행상하고 남은 물건이 든 대야를 머리에 이고 한두 시간 거리를 걸어오셨어요. 그 모습이 아직도 제 가슴 속에 오롯이 박혀있습니다. 어머니를 대신해 뭐라도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돈을 벌 방법도,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되는지 안내해주는 사람조차 없었죠. 가슴만 턱 막힌 듯 답답했습니다.

“너 어디 아프니?
무슨 근심 있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가난에 눌려있으니 내일이 없고, 꿈과 소망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무엇을 구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나를 위해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있었구나 알게 되었어요.

처음 느끼는 따뜻함

저는 여섯 남매 중 유일하게 컴패션 도움을 받았습니다. 10살이었던 저는 다니던 교회에서 컴패션 후원 어린이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인천에 있는 향진원에 가서 매달 10달러 정도의 후원금을 받았습니다. 향진원 송성준 원장님께서 제 가족상황과 일상을 물어보셨는데, 그분의 인상과 말씀이 너무 따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나도 저런 어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42년간 간직한 한 가지가 뭔지 아세요? 제 후원자님 ‘린다 프루에(Linda Frueh)’ 사진입니다. 이사를 가더라도 이 사진을 꼭 챙겼습니다. 편지에 후원자님은 자신을 메사추세츠주에서 동물을 키우며 사는 독신녀라고 소개했습니다. 언젠가 만나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 세계지도에서 후원자님이 사는 곳이 어디인지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물질적인 도움보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이 사실 가장 고팠던 것 같습니다. 가족이 있어도 서로가 힘들었기에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가 많았죠.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 외로움. 어디 기댈 데가 없고, 기댈 꿈도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컴패션에서 누군가가 나를 알고 사랑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었겠습니까. 제게 진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고민 가운데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에 기둥이 되어야겠다, 가정을 일으켜야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당시 추앙받는 판사, 검사, 변호사를 꿈꾸며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워낙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많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뭐지?
죽으면 어떻게 되지?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어떤 관계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의미에 대한 질문이지요.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장년 예배와 다락방 구역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어른들의 세계에 참여하고 신앙적으로 안내받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중, 고등학생 때부턴 새벽예배에 나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어머니께 신학을 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게 기대가 많으셨던 어머니께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셨을 겁니다. 하나님께 아들을 빼앗겼다고까지 말씀하셨으니까요.



후원 어린이에서 후원자로

누군가는 과거 후원받거나 도움받은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나의 연약함, 부끄러움보다 그 시절 도움받은 것이 절대적으로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누군가의 기도와 후원이 없었다면 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이 안 되기 때문이죠.

“제가 컴패션 출신입니다.
누군가의 도움과 기도가 없었다면
지금 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나누고 싶은 빚진 마음이 늘 마음 한 켠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4년 교역자로 섬기던 교회에서 한국이 후원국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과거에 컴패션의 도움을 받았고, 후원자님의 도움 하나, 손길 하나가 제게 살아갈 힘과 용기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2004년 11월, 저는 볼리비아에 사는 리제트(Lizeth)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2017년 9월부턴 필리핀 에드마(Edmar), 크리스(Cris), 클라크(Clark)를 돕고 있습니다.




꿈은 아이가
꿈꿀 수 있도록 돕는 건 후원자가

2012년 6월 11일부터 15일, 필리핀 비전트립을 다녀왔습니다. 작은 방 한 켠에 아파서 누워있는 아버지, 그 옆에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어머니가 계셨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곳에 고개 숙인 아이는 마치 제 어린 시절 모습 같았습니다. 아이와 가족에겐 작은 희망, 소망조차 무거워 보였어요.

그런 아이 먼저, 아이 대신 우리가 아이의 꿈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현실은 절망적이고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테지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고 있다고 가슴 깊이 말해주었습니다.


컴패션을 졸업한 학생들과 찍은 사진을 지금도 자주 보곤 합니다. 사진 속 건강하고 밝게, 기쁨과 확신에 찬 표정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졸업생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후원받기 전에 얼굴에 빛도 없던 어린이들이 너무나 밝고 환하게 변한 이유는 뭘까요?

‘컴패션 안에서 계속 사랑을 공급받으니깐
어린이들이 밝게 자라는 것이구나.
후원자님들이 너무 귀한 일을 하시는 구나.’


내가 꿈꾸는 컴패션

저는 ‘컴패션’(Compassion)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 긍휼’이란 뜻이지만 한편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어요. ‘패션(passion)’이 다른 의미로는 ‘열정’을 의미하잖아요. 그런데 ‘컴(com)’이 붙어서 그 ‘열정을 나누고 함께하자’는 의미로 말입니다. 지나친 열정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힘들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교회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컴패션의 진정성과 열정을 함께 느끼고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 안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각각 우리 안에 가난한 부분까지 채우실 거라 기대합니다. 성도들은 컴패션비전트립에 참여하시고, 북한에 있는 어린이에 대한 소망을 함께 키워가고 있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을 내 가족처럼 만나 서로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아주고, 힘껏 껴안아줄 날이 머잖아 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할 때 그 땅이, 그들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사랑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빚을 지니까 제게 소망이 생기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다시 전하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니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3-10절)



댓글
0 / 300자
  • 5219ktm
    2019-02-03 23:33:40

    동지를 만난 감동입니다. 참으로 감사드리고 2019년 새해 건강하시고 복많이받으세요.

  • vldksh1723
    2018-11-02 19:08:18

    감동했습니다

  • 1000ppp
    2018-10-13 13:28:11

    귀한나눔 감사합니다. 마음이 뭉클합니다. 사랑을 나누는 귀한일에 더욱 힘쓰도로 하여야 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 skyhu10
    2018-07-08 20:09:37

    너무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 rancarol
    2018-06-05 11:17:15

    우리나라도 이렇게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니ㅜㅜ 너무 가슴이 아파요. 꿈꾸던 멋진 어른이 되신 조광훈 님 이야기가 왠지 절절하게 와닿아요~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나누시는 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ㅠㅠ

최신 콘텐츠

  • 2025-05-12

가난 속에서도 꽃처럼 피어난 어린이들의 웃음에 매료돼 18년 째 컴패션 아이들의 미소를 사진에 담고 있는 38년차 허호 사진작가가 들려주는 인생 여행기

  • 2025-05-09

어린이들의 미소는 바라보기만 해도 같이 웃음 짓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조건과 환경에 물들지 않기에 더욱 아름답고 귀하게 다가오는 컴패션 어린이들의 일상 속의 사랑스러운 웃음을 사진으로 만나보세요!

  • 2025-05-07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빈티지숍 마켓인유(Market in U)를 창업하고 16년 동안 이끌어온 김성경 후원자를 만났습니다. 컴패션을 통해 맞이한 삶의 새로운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 눈빛에서 여전히 빛나는 열정이 돋보였습니다.

안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페이지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안내

삭제하시겠습니까?

뉴스레터 구독

이메일
이메일주소

인증코드 메일이 발송되었습니다.

이메일주소를 입력해주세요.

이메일주소를 정확히 입력해주세요.

입력하신 이메일에서 인증코드를 클릭하여 인증 후 인증확인 버튼을 눌러주세요.

인증 완료되었습니다.

인증코드를 클릭하여 인증해주세요.

정보수집 및 약관동의
이용목적 수집항목 보유기간
컴패션 소식 및 이벤트/캠페인 안내를 위한 이메일 발송 이메일 회원탈퇴 시 또는 제공동의 철회 시까지

※동의하지 않을 시 입력하신 정보는 즉시 파기되며, 동의 거부 시 뉴스레터를 수신할 수 없습니다.

컴패션 소식 및 이벤트/캠페인 수집 및 이용 동의 여부에 체크해주세요.

컴패션 소식 및 이벤트/캠페인 수집 및 이용 미동의 시
뉴스레터 구독신청을 할 수 없습니다

안내

OOO 후원자님,

혹시 이전에도 회원가입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후원자님 정보와 일치하는 계정이 확인되었습니다.

컴패션은 보다 나은 후원서비스 제공을 위해
후원정보 통합에 대한 안내를 드리고 있습니다.

후원정보 통합 안내 서비스를 신청하시겠습니까?

(관련문의 : 02-740-1000)

안내

통합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처리완료까지 3~4일의 시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빠른 처리를 원하실 경우 한국컴패션으로 전화 부탁 드립니다. (02-740-1000)

안내

통합 신청이 실패되었습니다.

1:1문의하기로 관련 내용을 남겨 주시면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내

'후원정보 확인 요청' 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 후 연락 드리겠습니다.

(영업일 기준 1~2일 내)

로딩중

주소검색

검색어 예 : 도로명(반포대로 58), 건물명(독립기념관), 지번(삼성동 25)

안내

찜한 후원에 담았습니다.

안내

안내

찜한 후원을 먼저 진행해주세요.
(1:1 어린이양육 : 최대 5명, 1:3 같이양육 : 최대 1회, 양육보완후원 : 최대 5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