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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과의 여섯 번의 만남

  • 작성일 2022-05-20

나의 아버지,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과

여섯 번의 만남

 

 

김운자 후원자

 

 

 

 

1969년 9월, 첫 만남,

서울 장신대학교 재학 시절.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후원자님께 어떻게 다가왔나요?

 

 6.25 전쟁 때 저는 여섯 살이었어요. 45년생이거든요. 저는 경북 영천군 금호면 대곡1리, 현재 주소로는 영천시 금호읍 대곡1리에서 태어났어요. 두 살 위 언니와 두 살 아래 남동생이 있었죠. 

 

6.25 전쟁 전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밤이면 산에서 빨치산들이 활개치고 낮에는 경찰이 감시하는 상황이었어요. 마을 남자들이 빨치산 때문에 밤에 집에서 편히 잠잘 수가 없어서 동네 뒷동산에서 잠을 자곤 했지요. 어느 날 밤에 경찰이 동네 뒷산을 급습하여 남자들을 경찰서로 잡아갔어요. 아버지도 같이 구치소에 잡혀 가셨죠. 6.25가 터졌을 때 영천이 폭탄으로 불바다가 됐습니다. 경찰은 이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구치소에 감금했던 19명의 아버지들을 전선줄로 엮어서 트럭에 싣고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모두 총살을 시켰습니다. 어머니가 그 소문을 듣고 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시신을 찾으러 갔지요. 총을 맞고 피로 뒤덮인 시체들 중에서 동네 다른 아버지들의 시신은 다 찾았으나 결국 우리 아버지 시신은 찾지 못했어요. 시신이 없으니 우리 아버지 장례도 못 치렀죠.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얼굴도, 사랑을 받은 기억도 나지 않아요. 

 

 

 

  홀로 남은 어머니는 혼자서 어떻게 세 자녀를 양육하셨을까요? 

 

  당시 우리 어머니 나이는 아버지와 동갑인 스물여덟 살이었어요. 전쟁 후 몇 년 동안 흉년이 연속으로 들어서 보릿고개도 극심했습니다. 이른 봄부터 나물을 뜯어 나물죽으로 배를 채우곤 했죠. 콩이이라도 있으면 디딜방아로 가루를 만들어 콩잎에 버무려 죽을 끓여 먹었어요. 우리 삼 남매는 양푼에 담아둔 음식을 선을 그어 놓고 요만큼은 내 것, 요만큼은 언니 거, 동생 거, 했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그것마저 안 잡수시는 거예요. 저희들 먹으라고. 철없던 저희들은 그 어머니 마음을 몰랐지요. 

 

어느 날 밤인데 어머니가 울고 있었어요. 잠결에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 보니 어린 삼 남매 자식들을 보시면서 울고 있었어요. 아마 이 셋을 내가 어떻게 먹여 살리나?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걱정이 되어 우셨던 것 같아요. 여러 번 그 장면을 보았어요. 

 

어머니가 그후 큰 결단을 하신 것 같아요. 길쌈도 하고 가마니를 짜서 내다 팔기 시작하셨어요. 어린 저희들도 일을 해야 했습니다. 손가락에 피가 나거나 해지기도 하고 길쌈을 위해 실을 만들다 무릎 위 허벅지가 까지면서 상처가 나기도 했어요. 예닐곱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솜씨가 좋았던 저는 어른처럼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일하기가 싫어서 가끔 반항하기도 했어요. “엄마, 왜 나를 태어나게 해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고생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견디며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어요. 

 

 

 

  미신이 가득한 마을의 안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게 되셨어요?  

 

  어릴 때 다닌 유곡교회(현 금호동부교회)는 역사가 114년(1908년 설립)이나 됩니다. 백 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가 있는 동네에서 태어난 것이 복이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4학년 때였습니다. 새로 오신 전도사님이 온 동네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고 방학 때는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를 했어요. 방학 때 성경학교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났어요. 

 

전도사님이 까만 물, 빨간 물, 하얀 물을 병에다 담아 놓고 말씀하시는데 제 마음에 새겨졌어요. 까만 것은 죄, 빨간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흰 것은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어떤 죄도 다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어요. 너무 좋았어요.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의심을 다 버리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어른 찬송을 같이 불렀는데 어린 제게 그 찬양도 좋았어요.

 

 

 

 

컴패션이 도운 전쟁 고아들과 한국 교회.

(컴패션 한국 소개 자료, 1960년대) 

 

 

 

 

  바로 교회에 나가신 거예요? 

  네, 교회 가는 것이 좋았고 예수님이 좋아졌어요. 기도하고 싶어지고 찬송가 부르는 것도 좋았어요. 철야 기도회에도 나가고 또 새벽 기도를 나갔어요. 새벽 기도는 새벽 4시 반에 나가야 하는데 시계가 없잖아요. 문을 열면 앞에 산이 보이는데 그 산 위에 샛별이 한 뼘 위로 떠오르면 시간이 새벽 네 시 반이었어요. 그 샛별이 제 시계가 되었어요.

 

그때의 겨울은 너무도 추웠어요. 어머니와 우리 네 식구는 이불 하나로 겨울밤을 지냈어요. 잠결에 이불을 서로 끌어당기면서 잤어요. 저는 새벽 기도 가기 위해서 한 잠 자고 잠이 깨면 별 시계를 봤어요. 별이 어디쯤 떴나 별 시계를 보려고 문을 열면 찬바람이 휙 들어와 주무시던 어머니가 잠이 깨어 춥다고 야단을 쳤어요. 그래도 새벽 기도 가는 것이 좋아서 욕을 먹어도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야단을 맞자 방법을 바꾸었어요. 교회에서 자고 새벽기도를 했어요. 교회는 산 밑에 있어서 밤에 부엉이 소리나 짐승소리가 들렸어요. 문고리도 없었지만 무섭지 않았어요.

 

 

  컴패션은 어떻게 연결되어 등록되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되던 어느 날 전도사님이 부르시더니, “운자야! 너 중학교 갈래?” 물어 보셨어요. 우리 가정 형편을 잘 아시는 전도사님이 생각지도 못했던 중학교를 보내 주겠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열심히 공부하여 경주여중에 입학했어요. 기쁜 마음으로 전도사님을 따라 간 곳은 경주시 동부리 마을, 6.25 전쟁으로 부모와 집을 잃고 오갈 곳 없고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고아들을 모아 양육하는 합숙소였어요. 이북에서 월남하신 분이 세운 고아원 설립 초기의 시설이었죠. 전쟁 후유증으로 나라가 매우 어려운 때인지라 시설이 열악한 것은 당연했지요. 한 방에 열 명 정도가 꼭꼭 끼어 잠을 자야 했던 매우 좁은 방이었어요. 이불도 없고 씻을 물도 없었어요. 목욕을 하지 않아서 머리와 옷에 이가 많이 생겼어요. 그것들이 밖으로 기어 나와 뒤에 있던 반 친구들이 잡아 주기도 했어요. 

 

그래도 제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까 부끄럽지 않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니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어요.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합숙소에서 20여 분 걸어서 경주중앙교회까지 새벽 기도를 다녔습니다.

 

 

 

 

 

한국 보육원을 방문하여 어린이들을 도왔던

컴패션 설립지 에버렛 스완슨 목사와 한국 어린이들.

 

 

 

합숙소에 미국 스완슨 목사님이 설립한 컴패션에서 후원할 한국 전쟁 고아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른 아이들과 같이 저도 신청을 했어요. 그런데 보육 선생님이 제가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셔서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날도 새벽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관심 있는 표정으로 몇 가지를 물어보셨어요. 어린아이가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보셨던 것 같았나 봐요. 제 이야기를 다 들어 보시더니 “너 사진 찍었어?” 물으시더라고요. 나이가 많아서 안 됐다고 하자, 사진 한 장 찍어 오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바로 컴패션과 함께할 고아원인 경주성애원을 설립한 원장님의 사모님이었어요. 제 호적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두 살이 적었어요. 그 덕에 컴패션에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합숙소 아이들은 그분이 설립한 경주성애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후원자님과 처음 만나셨을 때가 기억 나세요?

 

  나의 후원자 윌리엄 베이커 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사진으로였습니다. 63년 11월 25일, 내가 경주성애원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입니다. 

 

어느 날 담당 보육 선생님이 제게 외국인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시면서 이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후원자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서양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기분이 묘했어요. 이 분이 나의 후원자, 나의 양아버지가 되신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어요. 한편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리워하며 외로워했던 제게도 아버지가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하고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분 생신이 1925년 11월 17일이신데, 저희 아버지와 태어나신 연도도 같았어요. 그분은 하나님 다음으로 제게 가장 좋은 분이 되었어요. 큰 보배를 얻은 것과 같았어요. 이때부터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누리게 된 것은 제 인생 길에 큰 힘이 되었어요. 

 

 

 

 

 

1963년 11월 25일, 

사진으로 처음 만난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

 

 

 

  그분으로부터 받은 도움 중 가장 뜻깊은 것을 꼽으라면 무엇을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어릴 때나 대학생인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후원자께서는 때를 따라 선물을 보내 주시고 사랑의 격려 편지도 자주 보내 주셨어요. 시계, 책, 생활용품들이었습니다. 엄청난 선물이지요.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그분께 받은 큰 선물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서울에서 공부할 때 힘들었고 고생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꼭 이루고 싶으셨던 꿈이 있으셨을까요? 대학생 때, 윌리엄 후원자님의 도움은 어떤 식으로 전달되었을까요?

 

  제게는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지도자의 꿈이 있었어요. 그 꿈을 이루려고 영남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당시 나이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고 싶었으나 어리다고 전도사로 받아 주는 교회가 없었어요. 경주성애원으로 돌아가 고아들을 보살피는 보육교사가 되자 했는데 원장님이 바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때가 1968년 2월 대학 입시 때였습니다. 그렇게 되어 서울장신대학교 기독교 교육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또 힘들게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지만 즐겁기만 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 컴패션으로부터 제 이름으로 체이스멘하탄 은행통장을 만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했더니 그때부터 개인 통장으로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월 100불씩을 보내 주셨어요. 당시 한국 돈으로 약 2만 원인데, 정말 큰돈이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계속 보내주셨어요. 그 돈을 절약하여 등록금을 내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학에 다니고 있던 다른 어려운 대학생의 등록금으로 보태기도 했습니다. 그 학생은 나중에 목사님이 되어 지금 저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컴패션은 제 인생의 큰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당시 후원자님으로부터 참 많은 선물을 받으신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을 꼽는다면 어떤 선물이에요?

 

  기억에 남는 선물은 대학교 70년도 2월에 1학년 겨울 방학, 후원자님께서 저를 만나기 위하여 한국을 두 번째 방문하실 때 받은 선물입니다. 한 주 동안 한국에 계시면서 매일매일 만날 때마다 카메라, 라디오 등등 하나씩 주셨어요. 라디오를 주시면서 극동방송 “Back to the Bible”을 들으라고 했어요.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너무 자상하심을 느꼈어요. 학교에 다닐 때뿐만 아니라 결혼식 때에도, 결혼 후 첫 아기를 낳았을 때에도 항상 잊지 않으시고 격려의 편지와 선물, 축하금도 보내 주셨어요. 

 

또 한 가지 선물이 있습니다. 장신대학교 1학기를 마치고 실천신학 실습으로 농어촌교회를 섬기면서 여름성경학교를 지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대학교 교무처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후원자가 생일 선물로 축하금을 보내왔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어요. 그 돈으로 가장 필요했던 손목시계를 구입했습니다. 그 시계를 차고 얼마나 감사했던지! 눈물이 났어요. 어릴 때 고향 시골교회에서 새벽마다 교회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부르던 찬송이 생각났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라 ...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후원자께서는

매년 생일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꼭꼭 챙겨주셨습니다.

이분은 대체 어떤 분이신데 나를 위해 계속 선물을 보내 주실까,

그분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때 기도했습니다.하나님! 후원자님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더 크게 깨닫게 해 주셨어요.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이분이 격려의 편지와 가족 사진과 선물과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지요. 참 좋으신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분, 윌리엄 베이커 아버지를 꼭 만나게 해 주세요. 보고 싶어요.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아래 영문편지 끝에 한글로 9월 방문한다고 써 주셨어요.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라고.

한글을 모르시는 분이 사전 찾아서 쓰신 건데

글씨가 정말 예쁘죠.

 

 

 

 

  와!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이 김운자 후원자님을 만나러 직접 한국에 오신 건가요? 

 

  네! 윌리엄 베이커 아버지께서 저를 찾아왔어요. 그분이 저를 만나기 위해서 한국에 오셨다는 것이에요! 그날이 69년도 9월 19월이었어요. 컴패션에서 학교로 연락이 왔는데 김운자의 후원자 윌리엄 베이커 씨가 김포공항에 도착해 계시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후원자님께서 저를 만나러 오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출발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전달이 늦었던 것입니다. 연락을 받자마자 단숨에 김포공항으로 달려갔지요. 컴패션에서 통역해 주실 여자 선생님과 함께 갔습니다. 그때 후원자님은 서울 YMCA 호텔에서 머무시면서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 한국에 계셨고, 저는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사진도 많이 찍으면서 매일 후원자님을 만나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으로 꿈같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후원자님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지요. 3일 후, 그분이 계시는 일본으로 가실 때에 너무 섭섭해서 눈물이 저절로 흘렀답니다. 

 

 

    

 

첫 번째 한국을 방문하신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께 학교를 안내해 드렸습니다.

당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70년 2월, 두 번째 방문 때 모습.

일본에서 공군으로 복무하셨던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와 함께.

 

 

  윌리엄 후원자님이 일본에 거주하셨으면, 성인이 되셨을 때 김운자 후원자님도 직접 후원자님을 만나러 가실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일본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만났지요.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은 미국 공군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복무 중 일본 여인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셨습니다. 88년 10월에 제가 미국의 선교 훈련 프로그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동경에 내려 전화로 연락하고 신칸센 열차로 고베 역에 도착하니 후원자님과 부인, 아들, 딸 온 가족이 마중 나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행복한 방문이었습니다. 저를 반갑게 맞아 주신 후원자님은 20년 된 코르덴 점퍼를 입으시고 한국 사람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운동화를 신고 나오셨습니다. 저는 도착하던 그날은 호텔에서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후원자께서 사시는 집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준비된 식탁은 우유 한 잔, 빵 한 쪽, 그것이 아침겸 점심 식사 메뉴였어요. 저녁식사는 제가 가족을 모시고 식당에서 대접했습니다. 정말 행복했어요. 그간 받은 사랑과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아들과 딸에게 각각 용돈 천 불씩을 선물했습니다. 애들이 그것을 받으면서 이런 것 받아도 되는가를 묻기도 했어요. 

 

 

 

 

 

 

가족과 함께 후원 어린이였던 김운자 후원자를 배웅하러 나온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 

(고베 역과 집 앞에서 찍은 사진들)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김운자 후원자(아래 가운데).

 

"그간 받은 사랑과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후원자님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전형적인 일본 2층 목조건물이었어요. 오래된 집이라 유리창이 깨어져 금이 가 있었고 창문 사이에서 찬바람이 쌩쌩 들어오면서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어요. 88년 10월 14일 밤이었는데도 정말 추웠어요. 

 

밤새 울었어요. 후원자님이 입고 나오신 옷과 살고 있는 집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렇게 어렵게 사시면서 나를 도와주셨구나, 그 형편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에 한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가난하고 어렵게 살면서 내가 무엇이기에 오래도록 매달 100불씩을 저한테 보내줬어요.”

  

저는 미국 사람은 다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가난하고 이분은 부자이니까 도와주시는 줄 알았는데 직접 사시는 생활을 보고 그간의 생각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울면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다면 이분이 어떻게 저에게 그런 큰 사랑으로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하니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어요. 

 

 

 

 

 

90년도 일본 오사카 꽃박람회 장소에서 윌리엄 후원자님.

네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그분은 공군 제대 후 직업은 학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셨는데 참 힘들게 사시는 것 같았어요. 그 후에 저희 부부가 오사카에 수련회로 갔을 때에 꽃박람회 장소에서 만났어요. 고베에서 오사카까지는 먼 거리임에도 오셨는데 대접도 못하고 사진 한두 장만 찍고 헤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참 송구하게 되었어요. 그후에도 한국에 한 번 더 방문하셨지요. 

 

그리고 윌리엄 후원자님이 94년도에 한국에 오셔서 여섯 번째 만났습니다. 

 

 

 

 

 

1994년, 윌리엄 후원자님과 

1975년 남편이 개척한 강서중앙교회의

수양관을 짓기 위해 강화도에 매입한 3,500평 부지에

토목 공사를 마치고

본관을 짓기 전 방문하였습니다.

 

 

“이 사진이 후원자님과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몰랐습니다.

애기봉에 올라 북한 땅을 바라보며 한국 이야기를 해드리던 것이

후원자님과의 마지막이 될 줄

정말 몰랐습니다.”

 

 

 

 

 

 

 

 

   후원하시던 어린이가 잘 자라서 신학교까지 들어가고 교회를 개척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도 엄청 기쁘고 행복하셨을 것 같아요. 마지막 사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후 윌리엄 후원자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1995년 1월에 일본 고베에 대 지진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보고 걱정이 되어서 후원자님께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계속 전화를 받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후원자님이 이전에 보내 주신 미국 주소와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드렸더니 후원자님의 아내 분이 전화를 받았어요.

 

너무 반가워서 문안을 드렸더니 말씀하시기를 Daddy Died.”라고 하셨어요. 제가 전화드린 바로 그날이 후원자 윌리엄 베이커 님의 장례식을 마친 날이었대요. 혈액암으로 수술 중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베이커 후원자님의 아내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남편이 마지막으로 운자 너한테 편지를 쓰려고 병상에서 펜을 들었다가 놓고, 들었다가 놓곤, 몇 번이나 그렇게 하시다가 결국 편지 쓸 힘이 없어서 편지도 못 쓰고 너를 그렇게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다가 가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의 아버지가 천국에 가셨어요. 슬퍼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이제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날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답니다. 

  

 

 

  1975년도에 빈손으로 교회 개척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72년 2월에 장신대를 졸업하고 교수님 추천으로 후암장로교회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전임 전도사로 부임하여 유치원 원감, 교구를 담당하여 섬겼습니다. 교회 규모는 큰 교회였는데 교회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길거리에서 노는 애들 이름을 부르며 관심을 가지고 애들을 사랑으로 만나기 시작하며 전도했어요. 제가 담당한 유치부와 유초등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부흥이 되었어요. 

 

부임 후 2년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같은 고향 출신인 지금 남편 장세종 목사와 결혼했어요. 결혼하던 그해에 하나님이 쌍둥이 딸들을 선물로 주셨어요. 귀중한 선물을 받았으나 사역에 지장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의 배려로 3년 더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총신대학 신대원을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 후 전도사로 75년 7월에 개척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하여 개척한지 18개월 만에 땅 105평에 60평 규모의 단층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건축하고 입당한 그 다음날 지금 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아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지요. 저는 교회가 성장하면서 유치원, 어린이집을 개설하고 36년간 교육 사역을 하였습니다. 남편 장세종 목사님은 39년간 목양하다가 정년이 되어 2013년 12월 14일 원로목사로 은퇴했습니다.

 

 

 

  후원을 받았던 입장에서 지금 후원을 하고 계신데, 소감이 어떠세요?

 

  제가 후원을 받았던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아들이 먼저 컴패션에 후원을 연결해 주었어요. 다른 교회에서 목사로 섬기고 있는 아들의 말이 엄마도 컴패션에서 후원받으신 분으로 후원하시면 좋겠다고 권하였고 저도 평소에 늘 생각해 왔던 바였죠. 그래서 2012년도부터 우선 2명(가체리, 샤론)을 후원하였습니다. 후원하던 두 명 중 가체리 학생은 벌써 졸업을 하고 취직했다 하네요. 그리고 후원을 계속하여 현재는 샤론, 가테테, 디아나를 추가로 연결하여 지금 모두 3명을 후원하고 있어요. 그 후에 아들도 두 명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참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이 아이들에게는 그렇게는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1975년 개척한 강서중앙교회에서

39년간 목양을 마친 남편 장세종 목사님이

원로목사로 은퇴하던

2013년 12월 14일 함께 찍은 사진.

 

 

남편 장세종 원로목사님은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의 편지와 아내 김운자 후원자님의 답장,

선물 사진과 방문하였을 때의

사진들을 정갈하게 철을 해 두었습니다.

파일로 두 개나 됩니다.

 

부부 모두에게 윌리엄 후원자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나 봅니다.

 

 

 

 

  컴패션은 김운자 후원자님께 어떤 존재인가요.

 

 주님 오실 때까지 처음 시작한 모습대로 영적으로는 구원, 육적으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디딤돌이 컴패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컴패션은 저에게 아빠를 만나게 해준 중매자입니다. 컴패션이 없었다면 새로운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 어린이를 돕기 위해 시작한 컴패션이 70주년을 맞았습니다.

함께해 주시는 모든 후원자님들께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과

여섯 번의 만남

 

 

김운자 후원자

 

 

 

 

1969년 9월, 첫 만남,

서울 장신대학교 재학 시절.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후원자님께 어떻게 다가왔나요?

 

 6.25 전쟁 때 저는 여섯 살이었어요. 45년생이거든요. 저는 경북 영천군 금호면 대곡1리, 현재 주소로는 영천시 금호읍 대곡1리에서 태어났어요. 두 살 위 언니와 두 살 아래 남동생이 있었죠. 

 

6.25 전쟁 전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밤이면 산에서 빨치산들이 활개치고 낮에는 경찰이 감시하는 상황이었어요. 마을 남자들이 빨치산 때문에 밤에 집에서 편히 잠잘 수가 없어서 동네 뒷동산에서 잠을 자곤 했지요. 어느 날 밤에 경찰이 동네 뒷산을 급습하여 남자들을 경찰서로 잡아갔어요. 아버지도 같이 구치소에 잡혀 가셨죠. 6.25가 터졌을 때 영천이 폭탄으로 불바다가 됐습니다. 경찰은 이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구치소에 감금했던 19명의 아버지들을 전선줄로 엮어서 트럭에 싣고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모두 총살을 시켰습니다. 어머니가 그 소문을 듣고 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시신을 찾으러 갔지요. 총을 맞고 피로 뒤덮인 시체들 중에서 동네 다른 아버지들의 시신은 다 찾았으나 결국 우리 아버지 시신은 찾지 못했어요. 시신이 없으니 우리 아버지 장례도 못 치렀죠.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얼굴도, 사랑을 받은 기억도 나지 않아요. 

 

 

 

  홀로 남은 어머니는 혼자서 어떻게 세 자녀를 양육하셨을까요? 

 

  당시 우리 어머니 나이는 아버지와 동갑인 스물여덟 살이었어요. 전쟁 후 몇 년 동안 흉년이 연속으로 들어서 보릿고개도 극심했습니다. 이른 봄부터 나물을 뜯어 나물죽으로 배를 채우곤 했죠. 콩이이라도 있으면 디딜방아로 가루를 만들어 콩잎에 버무려 죽을 끓여 먹었어요. 우리 삼 남매는 양푼에 담아둔 음식을 선을 그어 놓고 요만큼은 내 것, 요만큼은 언니 거, 동생 거, 했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그것마저 안 잡수시는 거예요. 저희들 먹으라고. 철없던 저희들은 그 어머니 마음을 몰랐지요. 

 

어느 날 밤인데 어머니가 울고 있었어요. 잠결에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 보니 어린 삼 남매 자식들을 보시면서 울고 있었어요. 아마 이 셋을 내가 어떻게 먹여 살리나?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걱정이 되어 우셨던 것 같아요. 여러 번 그 장면을 보았어요. 

 

어머니가 그후 큰 결단을 하신 것 같아요. 길쌈도 하고 가마니를 짜서 내다 팔기 시작하셨어요. 어린 저희들도 일을 해야 했습니다. 손가락에 피가 나거나 해지기도 하고 길쌈을 위해 실을 만들다 무릎 위 허벅지가 까지면서 상처가 나기도 했어요. 예닐곱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솜씨가 좋았던 저는 어른처럼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일하기가 싫어서 가끔 반항하기도 했어요. “엄마, 왜 나를 태어나게 해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고생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견디며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어요. 

 

 

 

  미신이 가득한 마을의 안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게 되셨어요?  

 

  어릴 때 다닌 유곡교회(현 금호동부교회)는 역사가 114년(1908년 설립)이나 됩니다. 백 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가 있는 동네에서 태어난 것이 복이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4학년 때였습니다. 새로 오신 전도사님이 온 동네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고 방학 때는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를 했어요. 방학 때 성경학교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났어요. 

 

전도사님이 까만 물, 빨간 물, 하얀 물을 병에다 담아 놓고 말씀하시는데 제 마음에 새겨졌어요. 까만 것은 죄, 빨간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흰 것은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어떤 죄도 다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어요. 너무 좋았어요. “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의심을 다 버리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어른 찬송을 같이 불렀는데 어린 제게 그 찬양도 좋았어요.

 

 

 

 

컴패션이 도운 전쟁 고아들과 한국 교회.

(컴패션 한국 소개 자료, 1960년대) 

 

 

 

 

  바로 교회에 나가신 거예요? 

  네, 교회 가는 것이 좋았고 예수님이 좋아졌어요. 기도하고 싶어지고 찬송가 부르는 것도 좋았어요. 철야 기도회에도 나가고 또 새벽 기도를 나갔어요. 새벽 기도는 새벽 4시 반에 나가야 하는데 시계가 없잖아요. 문을 열면 앞에 산이 보이는데 그 산 위에 샛별이 한 뼘 위로 떠오르면 시간이 새벽 네 시 반이었어요. 그 샛별이 제 시계가 되었어요.

 

그때의 겨울은 너무도 추웠어요. 어머니와 우리 네 식구는 이불 하나로 겨울밤을 지냈어요. 잠결에 이불을 서로 끌어당기면서 잤어요. 저는 새벽 기도 가기 위해서 한 잠 자고 잠이 깨면 별 시계를 봤어요. 별이 어디쯤 떴나 별 시계를 보려고 문을 열면 찬바람이 휙 들어와 주무시던 어머니가 잠이 깨어 춥다고 야단을 쳤어요. 그래도 새벽 기도 가는 것이 좋아서 욕을 먹어도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야단을 맞자 방법을 바꾸었어요. 교회에서 자고 새벽기도를 했어요. 교회는 산 밑에 있어서 밤에 부엉이 소리나 짐승소리가 들렸어요. 문고리도 없었지만 무섭지 않았어요.

 

 

  컴패션은 어떻게 연결되어 등록되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되던 어느 날 전도사님이 부르시더니, “운자야! 너 중학교 갈래?” 물어 보셨어요. 우리 가정 형편을 잘 아시는 전도사님이 생각지도 못했던 중학교를 보내 주겠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열심히 공부하여 경주여중에 입학했어요. 기쁜 마음으로 전도사님을 따라 간 곳은 경주시 동부리 마을, 6.25 전쟁으로 부모와 집을 잃고 오갈 곳 없고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고아들을 모아 양육하는 합숙소였어요. 이북에서 월남하신 분이 세운 고아원 설립 초기의 시설이었죠. 전쟁 후유증으로 나라가 매우 어려운 때인지라 시설이 열악한 것은 당연했지요. 한 방에 열 명 정도가 꼭꼭 끼어 잠을 자야 했던 매우 좁은 방이었어요. 이불도 없고 씻을 물도 없었어요. 목욕을 하지 않아서 머리와 옷에 이가 많이 생겼어요. 그것들이 밖으로 기어 나와 뒤에 있던 반 친구들이 잡아 주기도 했어요. 

 

그래도 제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까 부끄럽지 않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니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어요.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합숙소에서 20여 분 걸어서 경주중앙교회까지 새벽 기도를 다녔습니다.

 

 

 

 

 

한국 보육원을 방문하여 어린이들을 도왔던

컴패션 설립지 에버렛 스완슨 목사와 한국 어린이들.

 

 

 

합숙소에 미국 스완슨 목사님이 설립한 컴패션에서 후원할 한국 전쟁 고아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다른 아이들과 같이 저도 신청을 했어요. 그런데 보육 선생님이 제가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셔서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날도 새벽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관심 있는 표정으로 몇 가지를 물어보셨어요. 어린아이가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보셨던 것 같았나 봐요. 제 이야기를 다 들어 보시더니 “너 사진 찍었어?” 물으시더라고요. 나이가 많아서 안 됐다고 하자, 사진 한 장 찍어 오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바로 컴패션과 함께할 고아원인 경주성애원을 설립한 원장님의 사모님이었어요. 제 호적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두 살이 적었어요. 그 덕에 컴패션에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합숙소 아이들은 그분이 설립한 경주성애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후원자님과 처음 만나셨을 때가 기억 나세요?

 

  나의 후원자 윌리엄 베이커 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사진으로였습니다. 63년 11월 25일, 내가 경주성애원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입니다. 

 

어느 날 담당 보육 선생님이 제게 외국인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시면서 이분이 너를 도와주시는 후원자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서양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기분이 묘했어요. 이 분이 나의 후원자, 나의 양아버지가 되신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어요. 한편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리워하며 외로워했던 제게도 아버지가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하고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분 생신이 1925년 11월 17일이신데, 저희 아버지와 태어나신 연도도 같았어요. 그분은 하나님 다음으로 제게 가장 좋은 분이 되었어요. 큰 보배를 얻은 것과 같았어요. 이때부터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누리게 된 것은 제 인생 길에 큰 힘이 되었어요. 

 

 

 

 

 

1963년 11월 25일, 

사진으로 처음 만난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

 

 

 

  그분으로부터 받은 도움 중 가장 뜻깊은 것을 꼽으라면 무엇을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어릴 때나 대학생인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후원자께서는 때를 따라 선물을 보내 주시고 사랑의 격려 편지도 자주 보내 주셨어요. 시계, 책, 생활용품들이었습니다. 엄청난 선물이지요.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그분께 받은 큰 선물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서울에서 공부할 때 힘들었고 고생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꼭 이루고 싶으셨던 꿈이 있으셨을까요? 대학생 때, 윌리엄 후원자님의 도움은 어떤 식으로 전달되었을까요?

 

  제게는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지도자의 꿈이 있었어요. 그 꿈을 이루려고 영남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당시 나이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고 싶었으나 어리다고 전도사로 받아 주는 교회가 없었어요. 경주성애원으로 돌아가 고아들을 보살피는 보육교사가 되자 했는데 원장님이 바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때가 1968년 2월 대학 입시 때였습니다. 그렇게 되어 서울장신대학교 기독교 교육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또 힘들게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지만 즐겁기만 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 컴패션으로부터 제 이름으로 체이스멘하탄 은행통장을 만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했더니 그때부터 개인 통장으로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월 100불씩을 보내 주셨어요. 당시 한국 돈으로 약 2만 원인데, 정말 큰돈이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계속 보내주셨어요. 그 돈을 절약하여 등록금을 내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학에 다니고 있던 다른 어려운 대학생의 등록금으로 보태기도 했습니다. 그 학생은 나중에 목사님이 되어 지금 저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컴패션은 제 인생의 큰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당시 후원자님으로부터 참 많은 선물을 받으신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을 꼽는다면 어떤 선물이에요?

 

  기억에 남는 선물은 대학교 70년도 2월에 1학년 겨울 방학, 후원자님께서 저를 만나기 위하여 한국을 두 번째 방문하실 때 받은 선물입니다. 한 주 동안 한국에 계시면서 매일매일 만날 때마다 카메라, 라디오 등등 하나씩 주셨어요. 라디오를 주시면서 극동방송 “Back to the Bible”을 들으라고 했어요.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너무 자상하심을 느꼈어요. 학교에 다닐 때뿐만 아니라 결혼식 때에도, 결혼 후 첫 아기를 낳았을 때에도 항상 잊지 않으시고 격려의 편지와 선물, 축하금도 보내 주셨어요. 

 

또 한 가지 선물이 있습니다. 장신대학교 1학기를 마치고 실천신학 실습으로 농어촌교회를 섬기면서 여름성경학교를 지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대학교 교무처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후원자가 생일 선물로 축하금을 보내왔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어요. 그 돈으로 가장 필요했던 손목시계를 구입했습니다. 그 시계를 차고 얼마나 감사했던지! 눈물이 났어요. 어릴 때 고향 시골교회에서 새벽마다 교회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부르던 찬송이 생각났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라 ...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후원자께서는

매년 생일선물, 크리스마스 선물, 꼭꼭 챙겨주셨습니다.

이분은 대체 어떤 분이신데 나를 위해 계속 선물을 보내 주실까,

그분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때 기도했습니다.하나님! 후원자님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더 크게 깨닫게 해 주셨어요.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이분이 격려의 편지와 가족 사진과 선물과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지요. 참 좋으신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분, 윌리엄 베이커 아버지를 꼭 만나게 해 주세요. 보고 싶어요.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아래 영문편지 끝에 한글로 9월 방문한다고 써 주셨어요.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라고.

한글을 모르시는 분이 사전 찾아서 쓰신 건데

글씨가 정말 예쁘죠.

 

 

 

 

  와!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이 김운자 후원자님을 만나러 직접 한국에 오신 건가요? 

 

  네! 윌리엄 베이커 아버지께서 저를 찾아왔어요. 그분이 저를 만나기 위해서 한국에 오셨다는 것이에요! 그날이 69년도 9월 19월이었어요. 컴패션에서 학교로 연락이 왔는데 김운자의 후원자 윌리엄 베이커 씨가 김포공항에 도착해 계시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후원자님께서 저를 만나러 오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출발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전달이 늦었던 것입니다. 연락을 받자마자 단숨에 김포공항으로 달려갔지요. 컴패션에서 통역해 주실 여자 선생님과 함께 갔습니다. 그때 후원자님은 서울 YMCA 호텔에서 머무시면서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 한국에 계셨고, 저는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사진도 많이 찍으면서 매일 후원자님을 만나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으로 꿈같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후원자님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지요. 3일 후, 그분이 계시는 일본으로 가실 때에 너무 섭섭해서 눈물이 저절로 흘렀답니다. 

 

 

    

 

첫 번째 한국을 방문하신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께 학교를 안내해 드렸습니다.

당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70년 2월, 두 번째 방문 때 모습.

일본에서 공군으로 복무하셨던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와 함께.

 

 

  윌리엄 후원자님이 일본에 거주하셨으면, 성인이 되셨을 때 김운자 후원자님도 직접 후원자님을 만나러 가실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일본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만났지요.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은 미국 공군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복무 중 일본 여인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셨습니다. 88년 10월에 제가 미국의 선교 훈련 프로그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동경에 내려 전화로 연락하고 신칸센 열차로 고베 역에 도착하니 후원자님과 부인, 아들, 딸 온 가족이 마중 나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행복한 방문이었습니다. 저를 반갑게 맞아 주신 후원자님은 20년 된 코르덴 점퍼를 입으시고 한국 사람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운동화를 신고 나오셨습니다. 저는 도착하던 그날은 호텔에서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후원자께서 사시는 집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준비된 식탁은 우유 한 잔, 빵 한 쪽, 그것이 아침겸 점심 식사 메뉴였어요. 저녁식사는 제가 가족을 모시고 식당에서 대접했습니다. 정말 행복했어요. 그간 받은 사랑과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아들과 딸에게 각각 용돈 천 불씩을 선물했습니다. 애들이 그것을 받으면서 이런 것 받아도 되는가를 묻기도 했어요. 

 

 

 

 

 

 

가족과 함께 후원 어린이였던 김운자 후원자를 배웅하러 나온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 

(고베 역과 집 앞에서 찍은 사진들)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김운자 후원자(아래 가운데).

 

"그간 받은 사랑과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후원자님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전형적인 일본 2층 목조건물이었어요. 오래된 집이라 유리창이 깨어져 금이 가 있었고 창문 사이에서 찬바람이 쌩쌩 들어오면서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어요. 88년 10월 14일 밤이었는데도 정말 추웠어요. 

 

밤새 울었어요. 후원자님이 입고 나오신 옷과 살고 있는 집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렇게 어렵게 사시면서 나를 도와주셨구나, 그 형편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에 한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가난하고 어렵게 살면서 내가 무엇이기에 오래도록 매달 100불씩을 저한테 보내줬어요.”

  

저는 미국 사람은 다 잘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가난하고 이분은 부자이니까 도와주시는 줄 알았는데 직접 사시는 생활을 보고 그간의 생각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울면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다면 이분이 어떻게 저에게 그런 큰 사랑으로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하니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어요. 

 

 

 

 

 

90년도 일본 오사카 꽃박람회 장소에서 윌리엄 후원자님.

네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그분은 공군 제대 후 직업은 학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셨는데 참 힘들게 사시는 것 같았어요. 그 후에 저희 부부가 오사카에 수련회로 갔을 때에 꽃박람회 장소에서 만났어요. 고베에서 오사카까지는 먼 거리임에도 오셨는데 대접도 못하고 사진 한두 장만 찍고 헤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참 송구하게 되었어요. 그후에도 한국에 한 번 더 방문하셨지요. 

 

그리고 윌리엄 후원자님이 94년도에 한국에 오셔서 여섯 번째 만났습니다. 

 

 

 

 

 

1994년, 윌리엄 후원자님과 

1975년 남편이 개척한 강서중앙교회의

수양관을 짓기 위해 강화도에 매입한 3,500평 부지에

토목 공사를 마치고

본관을 짓기 전 방문하였습니다.

 

 

“이 사진이 후원자님과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몰랐습니다.

애기봉에 올라 북한 땅을 바라보며 한국 이야기를 해드리던 것이

후원자님과의 마지막이 될 줄

정말 몰랐습니다.”

 

 

 

 

 

 

 

 

   후원하시던 어린이가 잘 자라서 신학교까지 들어가고 교회를 개척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도 엄청 기쁘고 행복하셨을 것 같아요. 마지막 사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후 윌리엄 후원자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1995년 1월에 일본 고베에 대 지진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보고 걱정이 되어서 후원자님께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계속 전화를 받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후원자님이 이전에 보내 주신 미국 주소와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드렸더니 후원자님의 아내 분이 전화를 받았어요.

 

너무 반가워서 문안을 드렸더니 말씀하시기를 Daddy Died.”라고 하셨어요. 제가 전화드린 바로 그날이 후원자 윌리엄 베이커 님의 장례식을 마친 날이었대요. 혈액암으로 수술 중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베이커 후원자님의 아내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남편이 마지막으로 운자 너한테 편지를 쓰려고 병상에서 펜을 들었다가 놓고, 들었다가 놓곤, 몇 번이나 그렇게 하시다가 결국 편지 쓸 힘이 없어서 편지도 못 쓰고 너를 그렇게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다가 가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의 아버지가 천국에 가셨어요. 슬퍼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이제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날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답니다. 

  

 

 

  1975년도에 빈손으로 교회 개척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72년 2월에 장신대를 졸업하고 교수님 추천으로 후암장로교회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전임 전도사로 부임하여 유치원 원감, 교구를 담당하여 섬겼습니다. 교회 규모는 큰 교회였는데 교회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길거리에서 노는 애들 이름을 부르며 관심을 가지고 애들을 사랑으로 만나기 시작하며 전도했어요. 제가 담당한 유치부와 유초등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부흥이 되었어요. 

 

부임 후 2년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같은 고향 출신인 지금 남편 장세종 목사와 결혼했어요. 결혼하던 그해에 하나님이 쌍둥이 딸들을 선물로 주셨어요. 귀중한 선물을 받았으나 사역에 지장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의 배려로 3년 더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총신대학 신대원을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 후 전도사로 75년 7월에 개척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하여 개척한지 18개월 만에 땅 105평에 60평 규모의 단층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건축하고 입당한 그 다음날 지금 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아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지요. 저는 교회가 성장하면서 유치원, 어린이집을 개설하고 36년간 교육 사역을 하였습니다. 남편 장세종 목사님은 39년간 목양하다가 정년이 되어 2013년 12월 14일 원로목사로 은퇴했습니다.

 

 

 

  후원을 받았던 입장에서 지금 후원을 하고 계신데, 소감이 어떠세요?

 

  제가 후원을 받았던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아들이 먼저 컴패션에 후원을 연결해 주었어요. 다른 교회에서 목사로 섬기고 있는 아들의 말이 엄마도 컴패션에서 후원받으신 분으로 후원하시면 좋겠다고 권하였고 저도 평소에 늘 생각해 왔던 바였죠. 그래서 2012년도부터 우선 2명(가체리, 샤론)을 후원하였습니다. 후원하던 두 명 중 가체리 학생은 벌써 졸업을 하고 취직했다 하네요. 그리고 후원을 계속하여 현재는 샤론, 가테테, 디아나를 추가로 연결하여 지금 모두 3명을 후원하고 있어요. 그 후에 아들도 두 명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참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이 아이들에게는 그렇게는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1975년 개척한 강서중앙교회에서

39년간 목양을 마친 남편 장세종 목사님이

원로목사로 은퇴하던

2013년 12월 14일 함께 찍은 사진.

 

 

남편 장세종 원로목사님은

윌리엄 베이커 후원자님의 편지와 아내 김운자 후원자님의 답장,

선물 사진과 방문하였을 때의

사진들을 정갈하게 철을 해 두었습니다.

파일로 두 개나 됩니다.

 

부부 모두에게 윌리엄 후원자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나 봅니다.

 

 

 

 

  컴패션은 김운자 후원자님께 어떤 존재인가요.

 

 주님 오실 때까지 처음 시작한 모습대로 영적으로는 구원, 육적으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디딤돌이 컴패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컴패션은 저에게 아빠를 만나게 해준 중매자입니다. 컴패션이 없었다면 새로운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 어린이를 돕기 위해 시작한 컴패션이 70주년을 맞았습니다.

함께해 주시는 모든 후원자님들께 감사합니다."

 

댓글
0 / 300자
  • hyeomin0321@icloud.com
    2022-06-14 16:39:40

    한편의 감동 드라마를 본듯 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일본까지 전해졌습니다. 김운자 사모님과 월리암 베이커씨와의 만남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너무 귀하고 그 사랑 너무 고귀합니다. 행복하고 감동있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

  • amzgrace
    2022-06-14 09:31:36

    너무 감동적입니다. 후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또 다른 후원으로 결실을 맺는 일들이 계속되길 소망해요

  • eh_chang@yahoo.com
    2022-06-13 23:41:13

    한편의 영화네요. 간증을 읽으며 아이들을 후원해야 하는 이유를 더 명확히 가슴에 새기며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동참 할수있길 기도합니다.

  • krischang@naver.com
    2022-06-13 21:55:09

    참 귀한 은혜에 감사합니다. 저희도 두 아이를 후원하는데 이처럼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길 기도합니다.

  • parksy2029@naver.com
    2022-06-10 22:32:43

    컴패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 사랑이 흘러가 한 영혼을 든든히 세워가는 간증이 멋져요

  • 99shallala@hanmail.net
    2022-06-10 18:39:15

    너무 감동적이네요 본받고 싶습니다ㅠ

  • lh9012
    2022-06-08 11:13:54

    정말 소중한 간증입니다. 후원만하고 깊은 사랑을 못 나눈 저에게 교훈이 됩니다. 더 사랑하겠습니다.

  • meetty
    2022-06-04 18:08:33

    감동적이네요. 저도 후원자지만 아이들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흘러보내지 못해 미안해지네요...

  • vetkang
    2022-05-31 06:58:19

    한편의 영화를 본듯합니다. 정말 귀한 이야기이고 컴패션의 살아있는 기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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