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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활동
어린이, 후원자
우리들의 컴패션 이야기
[나는 컴패셔너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고하는 말
안성찬, 이성미, 박성일 후원자
김명중 사진작가의 [나는 컴패셔너입니다] 촬영 현장
'컴패셔너'라는 말의 뜻을 알고 계시나요? 컴패션은 후원자 한 분 한 분을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더욱이 자랑스러워하지요. 이 마음을 담아 언젠가부터 후원자, 직원, 졸업생 어린이까지 컴패셔너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나는 컴패셔너입니다] 프로젝트를 통해서 어린이를 향한 동정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 함께 성장하고 있는 컴패셔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폴 매카트니 전속 사진작가, 김명중(MJ KIM) 작가가 담아낸, 후원자 컴패셔너 아홉 분의 따뜻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전해 드립니다.
그 첫 번째 시간,
안성찬, 이성미, 박성일 후원자가 전하는 삶의 고백.
숨 가쁘게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을
안아주고 토닥여줄 수 있는
솔직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금 만나 보세요.
※본 프로젝트는 컴패션 후원자와 후원기업의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pisode 1
l 기업가 안성찬 l
우리 너무 애쓰지 말아요
제 이름은 안성찬이고요. 폐기물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순환자원, 쉽게 얘기하면 폐기물을 사고팔고 관리를 하며, 폐기물을 최소화하고 매립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업체를 하고 있어요. 컴패션은 7,8년 전에 후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회사를 통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직원 한 명 들어올 때마다 아이들을 몇 명씩 후원했어요. 2017년부터 차곡차곡 매달 5, 10, 20, 25명··· 이렇게 후원 어린이가 늘었던 것 같아요.
사실 오늘 인터뷰할 때 이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시는 것처럼 이태원에서 사고가 있었잖아요. 저희 직원 중 하나가 세상을 떠났어요. 인터뷰를 오늘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할 정도로 마음이 아팠어요. 장례 기간 동안 저희 직원들이 곡을 했어요. 지난 10월은 저한테 많은 변화를 주었던, 또 한 번 가치관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같이 울 수 있는 회사'가 됐으면 좋겠어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같이 울어줘야 하잖아요. 우리 귀한 00(직원 이름)이거든요. 컴패션도 그렇고 귀하게 생각하는 생명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그런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어졌어요. 예전보다 더요. 돈 많이 벌어서 직원들한테 많이 주고 싶고요.
저희 회사가 '사람 사는 회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회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요.
그런 회사가 적어도 지옥 같은 환경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경쟁이 치열하고 결과 때문에 치이는 환경이 아니라
사람 사는 곳, 생활의 터전이 되기를 바라요.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거지?'라는 질문을 하게 됐어요. 제가 우리 동료들, 직원들 단톡방에 이 말을 남겼어요. "우리 너무 애쓰지 말아요." 저희 직원들은 지금도 되게 힘들죠. 같이 근무했던 분들은 상담도 받아야 되고요. 이런 치유하는 과정에 모두가 있어요.
인터뷰 내용이 나간다면 같이 일하는 동료, 우리 직원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너무 감사하다고...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같이 울어줘서 고맙단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하나의 과정이잖아요. 겪지 말아야 될 일이었지만, 우리가 좀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서로 찾아 나갔으면 좋겠어요.
컴패션은 제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동기부여'를 줘요. 솔직히 어린이들을 많이 후원하다 보니, '아, 우리 회사 망하면 안 돼. 더 잘 돼야 돼. '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오면서 컴패션의 어원을 한 번 찾아봤어요. 히브리어로 컴패션의 '패' 글자가 엄마를 뜻해요. 더 깊이 들어가면 여성의 자궁을 뜻한대요. 아버지가 모르는 어머니들만의 애통한 마음. 그런 마음을 뜻하는 것 같아요. 누가 지었는지 이름 정말 잘 지으셨어요.
컴패션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어린이들을 바라볼 때, 우리들의 신앙이 깊든 높든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 애통한 마음 주잖아요. 직원이 빨리 천 명 됐으면 좋겠어요. 더 많이 후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후원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 동료들이 공감해 주어서 참 고마워요. 컴패션 후원을 통해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귀한 생명과 삶이 바뀌고 있구나'라는 조그만 희망을 주는 것 같아서요. 그들에게 울림을 주기 때문에 컴패션한테 감사해요!
episode 2
l 개그우먼 이성미 l
우울을 안고 사는 사람에게
가수 션을 만나서 밥을 먹고 있을 때였어요. 컴패션 어쩌고저쩌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을 양육하는 단체인데 그때 당시 후원금이 4만 원이었어요. 그래서 "너는 몇 명 하니?" 물었죠. 그랬더니 100명이라고 하더라고요. '뭐 이런 애를 내가 만났지?' 하면서 집에 왔는데, 하나님 앞에 스스로가 부끄럽더라고요. 내 아이들 케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 한두 명? 이 정도는 돕는다고 하지만, 100명을 한다고? 그래서 선언했죠. '내가 션처럼은 못하지만 션의 십일조만큼은 하겠습니다.' 하고요. 그렇게 10명의 컴패션 어린이를 후원하기 시작했어요. 다시 션을 만나게 되었는데 10명을 후원하니까 솔직히 자랑하고 싶어서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저 요새 좀 늘었어요." 그러더라고요. 몇 명이냐고 물었더니 200명이라는 거죠. 아 괜히 물어봤네 하면서, 10명을 더해 20명을 후원하게 됐어요. 다시 션을 만났을 땐, 후원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요즘 400명 어린이 후원해요." 아 정말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죠. 근데 하나님과 약속을 했잖아요. 40명 오케이! 덕분에 40명의 아이들을 만나게 된 거죠.
후원하는 내 어린이들이 환갑잔치도 해주었어요. 필리핀에 가서 직접 그중 두 명도 만나고요. 환갑 때 사실 잔치하지 말고 환갑 여행을 가자, 그렇게 해서 컴패션 여행을 환갑 여행으로 가게 됐죠. 거기서 아이들이 갑자기 "해피벌스데이~" 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케이크를 만들어서 가지고 온 거예요. '하나님, 이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생일 케이크네요.' 진짜 목이 메더라고요.
나의 일부를 떼어서 아이들한테 줬는데
이 아이들은 그게 전부인 거죠.
그 아이들이 날 안아주면서 너무 고맙다는 거예요.
근데 내가 그 아이들한테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컴패션을 통해 너무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자동이체로 그냥 빠져나가는구나 그랬거든요. 근데 환갑 때 만난 그 아이들의 웃음은, 우리처럼 연예인이니까 카메라를 갖다 대면 웃는 웃음이 아니라 영혼이 웃는 웃음 같았어요. 활짝 웃는 모습을 보는 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정말 천사의 웃음 같고... 내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인데, 정말 마음을 다해서 해야 되는 일이구나 느꼈어요. 자동이체로 나가는 그 돈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었구나 깨닫게 되었죠.
그리고 현지에 가서 보니 정말 컴패션이 '클리어' 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기록이 담긴 내용을 보는데, 정말 선생님들이 기록해 놓을 걸 보면서 놀랐어요. 그걸 보면 안 할 수가 없어요. 내 자식도 여기에 맡기면 안 돼요? 그런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예요. 그 꼼꼼함과 섬세함. 그리고 특히 컴패션 어린이센터에서 일하는 선생님들께 존경한다고 표현하고 싶었어요.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내 아이도 아닌데, 이 아이는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말 기록을 다 하시더라고요.
제가 방송 활동 한 지는 43년, 80년에 데뷔해서 그렇게 됐죠. 전 개그맨이 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친구가 개그맨 시험을 보는데 여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렇게 개그맨이 된 거죠. "야 너 너무 잘한다. 뛰어난 아이야. 너 개그맨 소질이 있다." 개그를 하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한 칭찬을 들었어요. 이런 말을 처음 들었죠. 내가 잘 하는 걸 찾으니 너무 신이 나더라고요. 밤새워서 회의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개그맨이 돼서 개그맨 자격을 쌓아 갔던 것 같아요.
학교 다니면서도 나는 이상한 아이였어요. 얌전하고 되게 우울한 아이였죠. 선생님이 아버지를 따로 불러서 '혹시 얘가 죽을 지도 모르니까 잘 지켜봐 주세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요. 우리 집은 새엄마가 있었고 새엄마 자식들도 있어서 아버지는 그 눈치를 늘 보셨죠. 어머니는 내가 100일 됐을 때 떠나셨고요. 6학년 때까지 새엄마가 나를 돌봐주셨는데, 새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그때야 새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급 우울해졌죠. 그렇게 우울한 아이로 자라다가 아버지는 재혼을 두 번 더 하시면서 4혼 하셨어요. 내 가족은 없는 거죠 실질적으로. 그럴 때 위로의 말 한마디 해줄 한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냥 있어주고 들어주는, 그런 한 사람이 나는 필요했는데. 힘들지? 내가 옆에 있어 줄게만 해도 살 것 같았을 것 같아. 그 한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동안 잘 참아냈어. 그래 애썼어 걱정하지 마." 안아주는 사람이 필요했어서, 이제 그 일하는 게 제 몫이에요.
episode 3
l 인형제작자 박성일 l
그냥 평범한 하루로 족해요
저는 올해로 30년째 인형을 만들고 있고요. 컴패션 후원자로서 참여를 한 것은 올해 이제 갓 10년 됐습니다. 최근에 대표적으로 제가 제작을 했던 건, 평창 동계올림픽의 수호랑과 반다비. 서울시 마스코트 해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뽀로로, 로보카 폴리 등이 있네요.
이 일을 하게 된 계기요? 대학 졸업하고 약 1년 후에 롯데월드 어드벤처가 처음으로 잠실에 오픈했어요. 하루에 두 번씩 주간 퍼레이드, 야간 퍼레이드에 참여하면서 무대의상과 인형을 처음 접하게 됐죠. 더 중요한 건 거기서 와이프하고 만난 거예요. 아내는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결혼했어요. 제가 계획하고 10개월 만에 결혼을 했으니까요. 나름 작전이 있었죠. '그녀가 일하는 곳의 힘든 부분을 내가 담당해 주자!' 그때는 와이프가 무대의상 디자이너였어요. 의상 가지고는 돈을 벌 수 없으니 우리 사람이 쓰는 그 탈을 한 번 만들어보자, 그렇게 작업실 한쪽에 인형 생산 라인을 만들고 '장금신 아트워크'를 시작하게 되었죠.
인형 만드는 곳이 외부 사람이 보면 예쁠 것 같은데, 사실 섬유를 만지고 접착제를 쓰고 하니 그 냄새도 심하고, 섬유에서 날리는 먼지도 심해요. 그런 곳에서 계속 일했던 아내가 건강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 갔더니, 난소암 말기 판정을 받았어요. 근데 와이프가 성격이 그래요.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하고 한 번 일을 시작하면 3-4일을 안 자요. 그렇게 잠을 안 자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집요하고 미련스러울 정도로 참고... 그 정도면 정말 아팠을 텐데요.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냈나 봐요. 시기를 놓쳤죠.
일산 암 센터에 아내가 입원을 했을 때, 하루에 가장 따뜻한 시간대에 휠체어를 타고 나가서 바람을 쐐요. 그때 어린이 환우들을 보는데, 아내가 '참 예쁘다.' 얘기하더라고요. "저 아이들한테 인형을 만들어 주는 게 어떨까?" 선물하면 자기는 인형 만들어서 좋고, 아이들은 애착 인형이 생겨서 좋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병실에서 아이들을 위한 인형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고마 우체국' 프로젝트가 시작됐죠. 북극곰 '고마'가 운영하는 특별한 우체국이라는 의미로. 그 우체국은 아이들의 그림 편지를 받고 인형을 만들어서 매년 아이들에게 선물해 주는 거예요. 첫해에 병실에서 만든 건 대략 30개가 안됐던 것 같아요.
11월 5일, 우리 딸 수지 생일날 아내가 하늘나라에 갔어요. 어느 날은 밤을 꼬박 새우고 집에 갔는데, 와이프가 만들어주던 차돌하고 숙주로 만든 음식이 있어요. 제가 참 좋아했거든요. 갑자기 '아 이제 내가 그 차돌 숙주를 못 먹는구나...' 그 생각 하면서 하루 종일 울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희극 중에 손튼 와일더의 Our Town, '우리 읍내'라는 작품이 있어요. 그 작품에 저승사자, 사회자라는 역할이 있는데, 단 하루, 당신이 가장 가고 싶었던 그 날로 보내주겠다고 말해요. 주인공은 그냥 내가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되는 평범한 어느 날로 가고 싶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날로 돌아갔는데 엄마가 설거지를 하고 있고, "에밀리 아침밥 먹어야지, 빨리 학교 가야지." 그런 장면이거든요. 저도 그래요. 그런 하루면 족해요.
가끔 당신 생각, 하고 살고 있고
당신이 만든 그 회사는 잘 꾸려 가고 있어.
나도 편안하고 수지도 편안해.
(하늘에서) 너도 편안하겠지?
컴패션은 아내와 TV를 보는데 차인표 씨가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굉장히 보기 좋더라고요. 그렇게 첫 번째 아이를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냥 한 달에 얼마가 빠져나가는 그런 관계였죠. 와이프가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는요. 짝꿍이 하늘나라에 가고 슬퍼하는 시간에 우리 딸이 충격적인 한 마디를 했어요. "아빠는 인형을 그렇게 만들면서 나한테는 하나도 안 준거 알아? 아빠가 만들어서 준 건 없잖아!"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웃으면서 딸에게 "지금도 안 늦었어? 지금 만들어 줄게." 딸의 인형을 만들다가, 후원하던 어린이인 굴리의 사진을 발견하게 됐어요. '어, 나한테 딸이 하나 더 있었네.' 한 딸한테는 늦었지만 굴리한테는 안 늦은 것 같더라고요. 기왕이면 두 개 만들어서 수지한테도 주고, 굴리한테도 줘야겠다.
컴패션에 전화를 해서 인형을 아이한테 보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컴패션하고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죠. 굴리의 편지가 도착한 게 막 수지가 캐나다 가고 그 직후였으니까. 제 기억으로는 한 2월 말~3월 초였던 것 같아요. 그때 아내가 떠난 뒤고 제일 힘들었죠. 제 스스로도 '어 나 좀 위험한데...' 생각했을 때, 굴리가 보내준 편지를 보게 됐어요. '저는 노래를 부르는 걸 몹시 좋아해요. 이번 학예회에는 많은 아이들 앞에서 노래 부를 예정이에요. 전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에요. 후원자님을 위해 전 항상 기도해요.' 그냥 그 편지를 보는데 엄청 위로가 되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엉엉 울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기 전과 후가 확 달라졌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한 거구나!' 굴리를 통해서 아이의 밝은 모습을 계속 반복적으로 보게 되면서, '굴리가 기도하는 대로 한 번 살아보자.' 그렇게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한 어린이의 웃음이 많은 것을 바꿔 나갑니다.
컴패션 안에서 웃기 시작한 아이들은
가족의 삶에 희망을 싹 틔우고
후원자의 일상을 변화시킵니다.
그 아름다운 변화의 여정에
함께해 주세요♥
[나도 컴패셔너 되기]
[나는 컴패셔너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고하는 말
안성찬, 이성미, 박성일 후원자
김명중 사진작가의 [나는 컴패셔너입니다] 촬영 현장
'컴패셔너'라는 말의 뜻을 알고 계시나요? 컴패션은 후원자 한 분 한 분을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더욱이 자랑스러워하지요. 이 마음을 담아 언젠가부터 후원자, 직원, 졸업생 어린이까지 컴패셔너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나는 컴패셔너입니다] 프로젝트를 통해서 어린이를 향한 동정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 함께 성장하고 있는 컴패셔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폴 매카트니 전속 사진작가, 김명중(MJ KIM) 작가가 담아낸, 후원자 컴패셔너 아홉 분의 따뜻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전해 드립니다.
그 첫 번째 시간,
안성찬, 이성미, 박성일 후원자가 전하는 삶의 고백.
숨 가쁘게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을
안아주고 토닥여줄 수 있는
솔직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금 만나 보세요.
※본 프로젝트는 컴패션 후원자와 후원기업의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pisode 1
l 기업가 안성찬 l
우리 너무 애쓰지 말아요
제 이름은 안성찬이고요. 폐기물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순환자원, 쉽게 얘기하면 폐기물을 사고팔고 관리를 하며, 폐기물을 최소화하고 매립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업체를 하고 있어요. 컴패션은 7,8년 전에 후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회사를 통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직원 한 명 들어올 때마다 아이들을 몇 명씩 후원했어요. 2017년부터 차곡차곡 매달 5, 10, 20, 25명··· 이렇게 후원 어린이가 늘었던 것 같아요.
사실 오늘 인터뷰할 때 이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시는 것처럼 이태원에서 사고가 있었잖아요. 저희 직원 중 하나가 세상을 떠났어요. 인터뷰를 오늘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할 정도로 마음이 아팠어요. 장례 기간 동안 저희 직원들이 곡을 했어요. 지난 10월은 저한테 많은 변화를 주었던, 또 한 번 가치관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같이 울 수 있는 회사'가 됐으면 좋겠어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같이 울어줘야 하잖아요. 우리 귀한 00(직원 이름)이거든요. 컴패션도 그렇고 귀하게 생각하는 생명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그런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어졌어요. 예전보다 더요. 돈 많이 벌어서 직원들한테 많이 주고 싶고요.
저희 회사가 '사람 사는 회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회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요.
그런 회사가 적어도 지옥 같은 환경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경쟁이 치열하고 결과 때문에 치이는 환경이 아니라
사람 사는 곳, 생활의 터전이 되기를 바라요.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거지?'라는 질문을 하게 됐어요. 제가 우리 동료들, 직원들 단톡방에 이 말을 남겼어요. "우리 너무 애쓰지 말아요." 저희 직원들은 지금도 되게 힘들죠. 같이 근무했던 분들은 상담도 받아야 되고요. 이런 치유하는 과정에 모두가 있어요.
인터뷰 내용이 나간다면 같이 일하는 동료, 우리 직원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너무 감사하다고...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같이 울어줘서 고맙단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하나의 과정이잖아요. 겪지 말아야 될 일이었지만, 우리가 좀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서로 찾아 나갔으면 좋겠어요.
컴패션은 제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동기부여'를 줘요. 솔직히 어린이들을 많이 후원하다 보니, '아, 우리 회사 망하면 안 돼. 더 잘 돼야 돼. '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오면서 컴패션의 어원을 한 번 찾아봤어요. 히브리어로 컴패션의 '패' 글자가 엄마를 뜻해요. 더 깊이 들어가면 여성의 자궁을 뜻한대요. 아버지가 모르는 어머니들만의 애통한 마음. 그런 마음을 뜻하는 것 같아요. 누가 지었는지 이름 정말 잘 지으셨어요.
컴패션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어린이들을 바라볼 때, 우리들의 신앙이 깊든 높든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 애통한 마음 주잖아요. 직원이 빨리 천 명 됐으면 좋겠어요. 더 많이 후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후원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 동료들이 공감해 주어서 참 고마워요. 컴패션 후원을 통해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귀한 생명과 삶이 바뀌고 있구나'라는 조그만 희망을 주는 것 같아서요. 그들에게 울림을 주기 때문에 컴패션한테 감사해요!
episode 2
l 개그우먼 이성미 l
우울을 안고 사는 사람에게
가수 션을 만나서 밥을 먹고 있을 때였어요. 컴패션 어쩌고저쩌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을 양육하는 단체인데 그때 당시 후원금이 4만 원이었어요. 그래서 "너는 몇 명 하니?" 물었죠. 그랬더니 100명이라고 하더라고요. '뭐 이런 애를 내가 만났지?' 하면서 집에 왔는데, 하나님 앞에 스스로가 부끄럽더라고요. 내 아이들 케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 한두 명? 이 정도는 돕는다고 하지만, 100명을 한다고? 그래서 선언했죠. '내가 션처럼은 못하지만 션의 십일조만큼은 하겠습니다.' 하고요. 그렇게 10명의 컴패션 어린이를 후원하기 시작했어요. 다시 션을 만나게 되었는데 10명을 후원하니까 솔직히 자랑하고 싶어서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저 요새 좀 늘었어요." 그러더라고요. 몇 명이냐고 물었더니 200명이라는 거죠. 아 괜히 물어봤네 하면서, 10명을 더해 20명을 후원하게 됐어요. 다시 션을 만났을 땐, 후원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요즘 400명 어린이 후원해요." 아 정말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죠. 근데 하나님과 약속을 했잖아요. 40명 오케이! 덕분에 40명의 아이들을 만나게 된 거죠.
후원하는 내 어린이들이 환갑잔치도 해주었어요. 필리핀에 가서 직접 그중 두 명도 만나고요. 환갑 때 사실 잔치하지 말고 환갑 여행을 가자, 그렇게 해서 컴패션 여행을 환갑 여행으로 가게 됐죠. 거기서 아이들이 갑자기 "해피벌스데이~" 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케이크를 만들어서 가지고 온 거예요. '하나님, 이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생일 케이크네요.' 진짜 목이 메더라고요.
나의 일부를 떼어서 아이들한테 줬는데
이 아이들은 그게 전부인 거죠.
그 아이들이 날 안아주면서 너무 고맙다는 거예요.
근데 내가 그 아이들한테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컴패션을 통해 너무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자동이체로 그냥 빠져나가는구나 그랬거든요. 근데 환갑 때 만난 그 아이들의 웃음은, 우리처럼 연예인이니까 카메라를 갖다 대면 웃는 웃음이 아니라 영혼이 웃는 웃음 같았어요. 활짝 웃는 모습을 보는 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정말 천사의 웃음 같고... 내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인데, 정말 마음을 다해서 해야 되는 일이구나 느꼈어요. 자동이체로 나가는 그 돈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었구나 깨닫게 되었죠.
그리고 현지에 가서 보니 정말 컴패션이 '클리어' 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기록이 담긴 내용을 보는데, 정말 선생님들이 기록해 놓을 걸 보면서 놀랐어요. 그걸 보면 안 할 수가 없어요. 내 자식도 여기에 맡기면 안 돼요? 그런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예요. 그 꼼꼼함과 섬세함. 그리고 특히 컴패션 어린이센터에서 일하는 선생님들께 존경한다고 표현하고 싶었어요.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내 아이도 아닌데, 이 아이는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말 기록을 다 하시더라고요.
제가 방송 활동 한 지는 43년, 80년에 데뷔해서 그렇게 됐죠. 전 개그맨이 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친구가 개그맨 시험을 보는데 여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렇게 개그맨이 된 거죠. "야 너 너무 잘한다. 뛰어난 아이야. 너 개그맨 소질이 있다." 개그를 하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한 칭찬을 들었어요. 이런 말을 처음 들었죠. 내가 잘 하는 걸 찾으니 너무 신이 나더라고요. 밤새워서 회의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개그맨이 돼서 개그맨 자격을 쌓아 갔던 것 같아요.
학교 다니면서도 나는 이상한 아이였어요. 얌전하고 되게 우울한 아이였죠. 선생님이 아버지를 따로 불러서 '혹시 얘가 죽을 지도 모르니까 잘 지켜봐 주세요.'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요. 우리 집은 새엄마가 있었고 새엄마 자식들도 있어서 아버지는 그 눈치를 늘 보셨죠. 어머니는 내가 100일 됐을 때 떠나셨고요. 6학년 때까지 새엄마가 나를 돌봐주셨는데, 새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그때야 새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급 우울해졌죠. 그렇게 우울한 아이로 자라다가 아버지는 재혼을 두 번 더 하시면서 4혼 하셨어요. 내 가족은 없는 거죠 실질적으로. 그럴 때 위로의 말 한마디 해줄 한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냥 있어주고 들어주는, 그런 한 사람이 나는 필요했는데. 힘들지? 내가 옆에 있어 줄게만 해도 살 것 같았을 것 같아. 그 한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동안 잘 참아냈어. 그래 애썼어 걱정하지 마." 안아주는 사람이 필요했어서, 이제 그 일하는 게 제 몫이에요.
episode 3
l 인형제작자 박성일 l
그냥 평범한 하루로 족해요
저는 올해로 30년째 인형을 만들고 있고요. 컴패션 후원자로서 참여를 한 것은 올해 이제 갓 10년 됐습니다. 최근에 대표적으로 제가 제작을 했던 건, 평창 동계올림픽의 수호랑과 반다비. 서울시 마스코트 해치, 아이들이 좋아하는 뽀로로, 로보카 폴리 등이 있네요.
이 일을 하게 된 계기요? 대학 졸업하고 약 1년 후에 롯데월드 어드벤처가 처음으로 잠실에 오픈했어요. 하루에 두 번씩 주간 퍼레이드, 야간 퍼레이드에 참여하면서 무대의상과 인형을 처음 접하게 됐죠. 더 중요한 건 거기서 와이프하고 만난 거예요. 아내는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결혼했어요. 제가 계획하고 10개월 만에 결혼을 했으니까요. 나름 작전이 있었죠. '그녀가 일하는 곳의 힘든 부분을 내가 담당해 주자!' 그때는 와이프가 무대의상 디자이너였어요. 의상 가지고는 돈을 벌 수 없으니 우리 사람이 쓰는 그 탈을 한 번 만들어보자, 그렇게 작업실 한쪽에 인형 생산 라인을 만들고 '장금신 아트워크'를 시작하게 되었죠.
인형 만드는 곳이 외부 사람이 보면 예쁠 것 같은데, 사실 섬유를 만지고 접착제를 쓰고 하니 그 냄새도 심하고, 섬유에서 날리는 먼지도 심해요. 그런 곳에서 계속 일했던 아내가 건강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 갔더니, 난소암 말기 판정을 받았어요. 근데 와이프가 성격이 그래요.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하고 한 번 일을 시작하면 3-4일을 안 자요. 그렇게 잠을 안 자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집요하고 미련스러울 정도로 참고... 그 정도면 정말 아팠을 텐데요.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냈나 봐요. 시기를 놓쳤죠.
일산 암 센터에 아내가 입원을 했을 때, 하루에 가장 따뜻한 시간대에 휠체어를 타고 나가서 바람을 쐐요. 그때 어린이 환우들을 보는데, 아내가 '참 예쁘다.' 얘기하더라고요. "저 아이들한테 인형을 만들어 주는 게 어떨까?" 선물하면 자기는 인형 만들어서 좋고, 아이들은 애착 인형이 생겨서 좋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병실에서 아이들을 위한 인형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고마 우체국' 프로젝트가 시작됐죠. 북극곰 '고마'가 운영하는 특별한 우체국이라는 의미로. 그 우체국은 아이들의 그림 편지를 받고 인형을 만들어서 매년 아이들에게 선물해 주는 거예요. 첫해에 병실에서 만든 건 대략 30개가 안됐던 것 같아요.
11월 5일, 우리 딸 수지 생일날 아내가 하늘나라에 갔어요. 어느 날은 밤을 꼬박 새우고 집에 갔는데, 와이프가 만들어주던 차돌하고 숙주로 만든 음식이 있어요. 제가 참 좋아했거든요. 갑자기 '아 이제 내가 그 차돌 숙주를 못 먹는구나...' 그 생각 하면서 하루 종일 울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희극 중에 손튼 와일더의 Our Town, '우리 읍내'라는 작품이 있어요. 그 작품에 저승사자, 사회자라는 역할이 있는데, 단 하루, 당신이 가장 가고 싶었던 그 날로 보내주겠다고 말해요. 주인공은 그냥 내가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되는 평범한 어느 날로 가고 싶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날로 돌아갔는데 엄마가 설거지를 하고 있고, "에밀리 아침밥 먹어야지, 빨리 학교 가야지." 그런 장면이거든요. 저도 그래요. 그런 하루면 족해요.
가끔 당신 생각, 하고 살고 있고
당신이 만든 그 회사는 잘 꾸려 가고 있어.
나도 편안하고 수지도 편안해.
(하늘에서) 너도 편안하겠지?
컴패션은 아내와 TV를 보는데 차인표 씨가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굉장히 보기 좋더라고요. 그렇게 첫 번째 아이를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냥 한 달에 얼마가 빠져나가는 그런 관계였죠. 와이프가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는요. 짝꿍이 하늘나라에 가고 슬퍼하는 시간에 우리 딸이 충격적인 한 마디를 했어요. "아빠는 인형을 그렇게 만들면서 나한테는 하나도 안 준거 알아? 아빠가 만들어서 준 건 없잖아!"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웃으면서 딸에게 "지금도 안 늦었어? 지금 만들어 줄게." 딸의 인형을 만들다가, 후원하던 어린이인 굴리의 사진을 발견하게 됐어요. '어, 나한테 딸이 하나 더 있었네.' 한 딸한테는 늦었지만 굴리한테는 안 늦은 것 같더라고요. 기왕이면 두 개 만들어서 수지한테도 주고, 굴리한테도 줘야겠다.
컴패션에 전화를 해서 인형을 아이한테 보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컴패션하고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죠. 굴리의 편지가 도착한 게 막 수지가 캐나다 가고 그 직후였으니까. 제 기억으로는 한 2월 말~3월 초였던 것 같아요. 그때 아내가 떠난 뒤고 제일 힘들었죠. 제 스스로도 '어 나 좀 위험한데...' 생각했을 때, 굴리가 보내준 편지를 보게 됐어요. '저는 노래를 부르는 걸 몹시 좋아해요. 이번 학예회에는 많은 아이들 앞에서 노래 부를 예정이에요. 전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에요. 후원자님을 위해 전 항상 기도해요.' 그냥 그 편지를 보는데 엄청 위로가 되더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엉엉 울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기 전과 후가 확 달라졌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한 거구나!' 굴리를 통해서 아이의 밝은 모습을 계속 반복적으로 보게 되면서, '굴리가 기도하는 대로 한 번 살아보자.' 그렇게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한 어린이의 웃음이 많은 것을 바꿔 나갑니다.
컴패션 안에서 웃기 시작한 아이들은
가족의 삶에 희망을 싹 틔우고
후원자의 일상을 변화시킵니다.
그 아름다운 변화의 여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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