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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으로 바라봤던 세상, 그 안에서 만난 사랑
- 조희태 선생님(79세, 1960년대 컴패션 수혜자) -
날이 좋았던 어느 봄날, 전라북도 정읍에서 조희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해 한 쪽 눈이 실명되고, 병원비로 가세가 기울며 생긴 부모님의 냉대와 보육원에서 힘든 상황들, 쉽지 않았던 고된 삶 속에서 조희태 선생님은 사랑의 흔적들을 뚜렷하게 기억했습니다.
컴패션 덕분에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일, 스완슨 목사님을 만났던 순간, 이후 27년 간 교직 생활을 마치고 두 눈이 다 실명에 이르렀지만 책 2권을 펴낸 작가의 삶까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삶 속에서 크고 작게 이어진 사랑과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단단하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갔던, 조희태 선생님의 인생을 전합니다.
Q. 조희태 선생님,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안녕하세요. 46년생이니까, 지금 만 79세네요. 27년 동안 수학교사로 있다가 2008년에 정년 퇴직했어요. 제가 원래 한쪽 눈이 안 보였는데, 그 무렵부터는 완전히 실명이 됐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시각장애인이 된 뒤에 오히려 오디오북을 통해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덕분에 책 2권을 펴냈습니다. 『13살 솔시레』, 『서서 번연 채근담』을 냈고요. 현재는 개정판을 내려고 고민하고 있고, 유튜브 채널 <조희태>를 통해 낭독도 하고 있습니다.
Q.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어렸을 때는 8남매 중에 여섯째로,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컸어요. 두 살 때 사고로 시력에 이상이 생겼는데, 부모님이 치료에 온 정성을 기울였죠. 다행히 한쪽 눈은 회복됐지만 다른 한쪽은 결국 실명 됐어요.
그런데 집안이 일어서려는 중요한 시기에 나를 치료하느라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생긴 거예요. 열 살이 지나니까 “너 때문에 집안이 못 일어섰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집에 손님이 오면 숨어 있으라고 그랬어요. 점점 더 냉대를 받게 됐고,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죠. 그래서 나왔어요. 그리고 보육원 귀계원으로 들어가게 된 거죠.
1966년 컴패숀 시설 앨범에 나와 있는 귀계원과 조순희 원장의 사진. 집을 나와서 어린 시절을 귀계원에서 보낸 조희태 선생님.
Q. 컴패션 보육원이었던 귀계원에서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요?
씨름대회가 있었어요. 결승까지 올라갔는데, 상대는 원장님의 양아들이었던 친구였죠. 경기가 시작되자, 직원들이 그 친구 편만 들더라고요. 급기야 “한쪽 눈 가려라!”는 말까지 들었고, 결국 경기에 졌죠. 그때 참 허탈하고 외로웠어요. 그네에 앉아 찬송가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를 부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여학생이 조용히 다가와 제 머리에 묻은 모래를 털어줬어요. 그 따뜻한 손길이 마치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처럼 느껴졌죠. 그때 처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것 같아요.
그리고 한 번은 등교길에 어떤 불량배에게 돌로 머리를 찍혔어요. 출혈이 너무 심해서 상처를 부여잡고 걸어가는 길에 어떤 아주머니가 보시고 치료해 주셨죠. 죽은 것처럼 기절했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일어났고, 한참 후에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때 귀계원 보모들이 실컷 먹어야 된다면서 나를 데려가서 몰래 밥을 더 줬어요. 그래서 빨리 회복된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정말 크게 다쳤거든요. 지금도 흉터가 있어요.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Q. 광주숭일학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요?
귀계원에서 나오고 정읍에서 아이스께끼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귀계원 총무와 우연하게 만나게 됐어요. 이때 스완슨 목사님이 전국 보육원에서 똑똑한 친구들을 광주숭일학교로 보내려고 선발 중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귀계원에서 ‘조희태가 똑똑하다’면서 나를 찾아서 정읍까지 온 거였어요. 담당 총무가 정읍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기적처럼 나를 만나서 “너 여기서 뭐해? 공부시켜 줄게 가자.”고 해서 따라갔죠. 참 하나님의 섭리예요. 그래서 귀계원 덕분에 숭일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학비랑 생활비도 다 지원받았어요. 그때가 열다섯 살인가 되었어요.
기독 고등학교 이사회 및 직원. 스완슨 목사(첫째 줄 가운데)는 광주에 있는 100명의 고아들이 다닐 수 있는 이 훌륭한 기독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개교 준비를 막 마쳤습니다. 컴패션은 수업료로 연간 5,000달러를 지불합니다. 한국 현지 대표인 모건(Morgan) 목사와 한국 비서인 피터 강도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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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패션 뉴스레터 1963년 5-6월호에 소개되어 있는 광주숭일학교.
Q. 광주숭일학교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숭일학교에서 성경을 만났죠. 기숙사에서 목사님이 설교해 주셨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모세에 대한 설교였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버렸지만 결국 하나님이 모세를 사용하셨다는 내용이었어요. 지금 너희들도 부모님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너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는 말씀을 해줬어요. 그 설교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고, 성경을 그때부터 많이 읽었어요.
또, 채플 예배를 전체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찬송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를 부르며 “우리 다 같이 손 들고 찬양합시다!”라고 외쳤는데, 전교생이 다 손을 들고 따라왔어요. 예배 후 목사님께서 “대성공이다!”라고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대표 기도도 했는데, 당시 전도사님이 “네 목소리가 좋으니까 너로 하자.”고 해줬죠. 그게 엄청 큰 힘이 됐어요. 목소리에 대한 자신감도 그때부터 생긴 것 같습니다.
Q. 당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유명해졌다고요?
이 신앙심을 당시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다는 마음에 편지를 썼어요. 기억나는 건 “지금 대통령을 하시는데 나라 정치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대통령께서 예수님을 모셔야 되겠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고아 소년이 한국 대통령에게 간증하다.
저희 귀계원(Valley of Return Orphanage)의 조희태(Cho Hee Tae) 군이 최근 박정희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친애하는 박정희 장군님, 지금 장군님의 지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께서 장군님을 지금의 장군님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정말로 이해하신다면, 장군님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장군님이 주님을 믿고 그분의 도를 따르신다면, 하나님은 장군님에게 백배의 축복을 더해 주실 것이며 장군님의 일을 더욱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장군님은 자신의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며, 저는 장군님이 이미 그분을 마음에 영접하셨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지금 바로 영접하십시오. 그것이 장군님이 모든 일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장군님, 정말 감사합니다.”
희태는 컴패션이 여러 소년들을 보내고 있는 기독교 중·고등학교의 7학년 학생입니다. 그는 한쪽 눈은 잘 보이지 않지만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저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그의 간증과 용기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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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패션 뉴스레터 1963년 11-12월호에 소개된 당시 조희태 어린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내용.
그런데 답장이 온 거예요. 친필 답장이 왔어요. 내용은 기억 나기로는 “귀계원 학생이 대통령한테 선교 활동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는 내용이었어요. 답장까지 오니까 숭일학교에서도 떠들썩 했어요. 광주 일대에서 ‘대통령에게 편지 보낸 소년’으로 조금 유명해지기도 했어요.
그게 스완슨 목사님까지 알려져서, 스완슨 목사님이 직접 광주로 오셨어요. 나 때문에, 나를 보려고 오신 거였죠. 강당에 학교 친구들을 다 모아놓고, 저를 앞에 세워두고 설교를 했어요. 한 친구가 스완슨 목사님이 계속 ‘원아이(One eye)’만 말하셨다고 알려줬죠.
Q. 지금 돌아보면, 후원은 어떤 의미였나요?
후원이 없었다면 저는 귀계원에서 평생 일만 하다가 끝났을지도 몰라요. 지금과 달리 그 당시 보육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일을 많이 시켰거든요. 그런데 스완슨 목사님 덕분에 학교도 가게 됐고, 목사님이 직접 와서 설교도 해주고, 미국에서 치료도 해주시려고 했었죠.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서 이뤄지진 않았지만요. 스완슨 목사님이 소천하시고 후원이 끊긴 뒤엔 생활이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분이 내 인생의 길을 트이게 해주신 분이라고 믿어요. 가장 고마운 분이죠.
후원자가 보내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기억도 있어요. 20명 중에 5명만 받았던 그 옷, 몇 년이고 아껴 입었죠.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어요.
Q. 교사의 꿈은 언제부터 꾸게 되었나요?
뭘 해도 실패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귀계원에 있을 때 『소공녀』 책을 보게 됐어요. 책의 이야기가 아버지가 원래 부자였다가 실패하면서 딸이 기숙학교에서 푸대접을 받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아버지의 후원금이 발견되면서 딸이 다시 호강하게 되죠. 그걸 보는데 나에겐 예수님이 있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수님을 만나면 내게도 인생이 반전되는 희망이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한 번 읽으면 스토리가 다 꿰지고, 두 번 읽으면 그 내용을 남에게 전달해 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어렵게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일하다가 2008년에 ‘대한민국 녹조 근정훈장’을 받고 퇴직했습니다. 참 감사하고 영광스러웠어요.
조희태 선생님이 퇴직하며 받은 ‘대한민국 녹조 근정훈장’. 위 훈장은 대한민국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으로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노고를 기리는 상징적인 훈장입니다. |
Q. 마지막으로,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제가 머릿속에 꼭 넣고 다니는 말씀이 있어요.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여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죠. 교회를 통해서든, 성경을 통해서든 찬송가 가사처럼 시냇물 속에서도 꽃과 모든 풀들 속에서도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길 바라요.
또 이사야 48장 10절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고생이 심할수록 더 큰 열매가 생기는 것 같아요. 어려운 일, 불편한 일과 부딪히게 되면 내가 연단 받고 있구나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 말씀들을 다 명심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조희태 선생님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름 석 자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내며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시기를
컴패션,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지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단단한 사랑 안에서 지나온
귀한 삶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한 눈으로 바라봤던 세상,
그 안에서 만난 사랑
조희태 선생님
(79세, 1960년대 컴패션 수혜자)
날이 좋았던 어느 봄날, 전라북도 정읍에서 조희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해 한 쪽 눈이 실명되고, 병원비로 가세가 기울며 생긴 부모님의 냉대와 보육원에서 힘든 상황들, 쉽지 않았던 고된 삶 속에서 조희태 선생님은 사랑의 흔적들을 뚜렷하게 기억했습니다.
컴패션 덕분에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일, 스완슨 목사님을 만났던 순간, 이후 27년 간 교직 생활을 마치고 두 눈이 다 실명에 이르렀지만 책 2권을 펴낸 작가의 삶까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삶 속에서 크고 작게 이어진 사랑과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단단하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갔던, 조희태 선생님의 인생을 전합니다.
Q. 조희태 선생님,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안녕하세요. 46년생이니까, 지금 만 79세네요. 27년 동안 수학교사로 있다가 2008년에 정년 퇴직했어요. 제가 원래 한쪽 눈이 안 보였는데, 그 무렵부터는 완전히 실명이 됐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둠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시각장애인이 된 뒤에 오히려 오디오북을 통해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덕분에 책 2권을 펴냈습니다. 『13살 솔시레』, 『서서 번연 채근담』을 냈고요. 현재는 개정판을 내려고 고민하고 있고, 유튜브 채널 <조희태>를 통해 낭독도 하고 있습니다.
Q.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어렸을 때는 8남매 중에 여섯째로,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컸어요. 두 살 때 사고로 시력에 이상이 생겼는데, 부모님이 치료에 온 정성을 기울였죠. 다행히 한쪽 눈은 회복됐지만 다른 한쪽은 결국 실명 됐어요.
그런데 집안이 일어서려는 중요한 시기에 나를 치료하느라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생긴 거예요. 열 살이 지나니까 “너 때문에 집안이 못 일어섰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집에 손님이 오면 숨어 있으라고 그랬어요.
점점 더 냉대를 받게 됐고,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죠. 그래서 나왔어요. 그리고 보육원 귀계원으로 들어가게 된 거죠.
1966년 컴패숀 시설 앨범에 나와 있는 귀계원과 조순희 원장의 사진. 집을 나와서 어린 시절을 귀계원에서 보낸 조희태 선생님.
Q. 컴패션 보육원이었던 귀계원에서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요?
씨름대회가 있었어요. 결승까지 올라갔는데, 상대는 원장님의 양아들이었던 친구였죠. 경기가 시작되자, 직원들이 그 친구 편만 들더라고요. 급기야 “한쪽 눈 가려라!”는 말까지 들었고, 결국 경기에 졌죠.
그때 참 허탈하고 외로웠어요. 그네에 앉아 찬송가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를 부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여학생이 조용히 다가와 제 머리에 묻은 모래를 털어줬어요. 그 따뜻한 손길이 마치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처럼 느껴졌죠. 그때 처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것 같아요.
그리고 한 번은 등교길에 어떤 불량배에게 돌로 머리를 찍혔어요. 출혈이 너무 심해서 상처를 부여잡고 걸어가는 길에 어떤 아주머니가 보시고 치료해 주셨죠. 죽은 것처럼 기절했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일어났고, 한참 후에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때 귀계원 보모들이 실컷 먹어야 된다면서 나를 데려가서 몰래 밥을 더 줬어요. 그래서 빨리 회복된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정말 크게 다쳤거든요. 지금도 흉터가 있어요.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Q. 광주숭일학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요?
귀계원에서 나오고 정읍에서 아이스께끼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귀계원 총무와 우연하게 만나게 됐어요. 이때 스완슨 목사님이 전국 보육원에서 똑똑한 친구들을 광주숭일학교로 보내려고 선발 중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귀계원에서 ‘조희태가 똑똑하다’면서 나를 찾아서 정읍까지 온 거였어요. 담당 총무가 정읍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기적처럼 나를 만나서 “너 여기서 뭐해? 공부시켜 줄게 가자.”고 해서 따라갔죠.
참 하나님의 섭리예요. 그래서 귀계원 덕분에 숭일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학비랑 생활비도 다 지원받았어요. 그때가 열다섯 살인가 되었어요.
기독 고등학교 이사회 및 직원. 스완슨 목사(첫째 줄 가운데)는 광주에 있는 100명의 고아들이 다닐 수 있는 이 훌륭한 기독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개교 준비를 막 마쳤습니다. 컴패션은 수업료로 연간 5,000달러를 지불합니다. 한국 현지 대표인 모건(Morgan) 목사와 한국 비서인 피터 강도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컴패션 뉴스레터 1963년 5-6월호에 소개되어 있는 광주숭일학교.
Q. 광주숭일학교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숭일학교에서 성경을 만났죠. 기숙사에서 목사님이 설교해 주셨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모세에 대한 설교였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버렸지만 결국 하나님이 모세를 사용하셨다는 내용이었어요.
지금 너희들도 부모님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너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는 말씀을 해줬어요. 그 설교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고, 성경을 그때부터 많이 읽었어요.
또, 채플 예배를 전체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찬송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를 부르며 “우리 다 같이 손 들고 찬양합시다!”라고 외쳤는데, 전교생이 다 손을 들고 따라왔어요. 예배 후 목사님께서 “대성공이다!”라고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대표 기도도 했는데, 당시 전도사님이 “네 목소리가 좋으니까 너로 하자.”고 해줬죠. 그게 엄청 큰 힘이 됐어요. 목소리에 대한 자신감도 그때부터 생긴 것 같습니다.
Q. 당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유명해졌다고요?
이 신앙심을 당시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다는 마음에 편지를 썼어요. 기억나는 건 “지금 대통령을 하시는데 나라 정치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대통령께서 예수님을 모셔야 되겠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고아 소년이 한국 대통령에게 간증하다.
저희 귀계원(Valley of Return Orphanage)의 조희태(Cho Hee Tae) 군이 최근 박정희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친애하는 박정희 장군님, 지금 장군님의 지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께서 장군님을 지금의 장군님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정말로 이해하신다면, 장군님이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장군님이 주님을 믿고 그분의 도를 따르신다면, 하나님은 장군님에게 백배의 축복을 더해 주실 것이며 장군님의 일을 더욱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장군님은 자신의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며, 저는 장군님이 이미 그분을 마음에 영접하셨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지금 바로 영접하십시오. 그것이 장군님이 모든 일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장군님, 정말 감사합니다.”
희태는 컴패션이 여러 소년들을 보내고 있는 기독교 중·고등학교의 7학년 학생입니다. 그는 한쪽 눈은 잘 보이지 않지만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저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그의 간증과 용기에 감사합니다.
컴패션 뉴스레터 1963년 11-12월호에 소개된 당시 조희태 어린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내용.
그런데 답장이 온 거예요. 친필 답장이 왔어요. 내용은 기억 나기로는 “귀계원 학생이 대통령한테 선교 활동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는 내용이었어요.
답장까지 오니까 숭일학교에서도 떠들썩 했어요. 광주 일대에서 ‘대통령에게 편지 보낸 소년’으로 조금 유명해지기도 했어요.
그게 스완슨 목사님까지 알려져서, 스완슨 목사님이 직접 광주로 오셨어요. 나 때문에, 나를 보려고 오신 거였죠. 강당에 학교 친구들을 다 모아놓고, 저를 앞에 세워두고 설교를 했어요.
한 친구가 스완슨 목사님이 계속 ‘원아이(One eye)’만 말하셨다고 알려줬죠.
Q. 지금 돌아보면, 후원은 어떤 의미였나요?
후원이 없었다면 저는 귀계원에서 평생 일만 하다가 끝났을지도 몰라요. 지금과 달리 그 당시 보육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일을 많이 시켰거든요.
스완슨 목사님 덕분에 학교도 가게 됐고, 목사님이 직접 와서 설교도 해주고, 미국에서 치료도 해주시려고 했었죠.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서 이뤄지진 않았지만요.
스완슨 목사님이 소천하시고 후원이 끊긴 뒤엔 생활이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분이 내 인생의 길을 트이게 해주신 분이라고 믿어요. 가장 고마운 분이죠.
후원자가 보내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기억도 있어요. 20명 중에 5명만 받았던 그 옷, 몇 년이고 아껴 입었죠. 정말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어요.
Q. 교사의 꿈은 언제부터 꾸게 되었나요?
뭘 해도 실패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귀계원에 있을 때 『소공녀』 책을 보게 됐어요.
책의 이야기가 아버지가 원래 부자였다가 실패하면서 딸이 기숙학교에서 푸대접을 받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아버지의 후원금이 발견되면서 딸이 다시 호강하게 되죠.
그걸 보는데 나에겐 예수님이 있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수님을 만나면 내게도 인생이 반전되는 희망이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한 번 읽으면 스토리가 다 꿰지고, 두 번 읽으면 그 내용을 남에게 전달해 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어렵게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일하다가 2008년에 ‘대한민국 녹조 근정훈장’을 받고 퇴직했습니다. 참 감사하고 영광스러웠어요.
조희태 선생님이 퇴직하며 받은 ‘대한민국 녹조 근정훈장’. 위 훈장은 대한민국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으로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노고를 기리는 상징적인 훈장입니다.
Q. 마지막으로,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제가 머릿속에 꼭 넣고 다니는 말씀이 있어요.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여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죠.
교회를 통해서든, 성경을 통해서든 찬송가 가사처럼 시냇물 속에서도 꽃과 모든 풀들 속에서도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길 바라요.
또 이사야 48장 10절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고생이 심할수록 더 큰 열매가 생기는 것 같아요.
어려운 일, 불편한 일과 부딪히게 되면 내가 연단 받고 있구나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 말씀들을 다 명심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조희태 선생님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름 석 자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내며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시기를
컴패션,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지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단단한 사랑 안에서 지나온
귀한 삶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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